(울고있다)
벌써 겨울인데. 눈, 내려주지 않으려나.
하얀 눈이 소복하게 내리면 우리 발자국을 눈으로 볼 수 있겠지.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우리 둘만 걷자. 곧 새로이 내린 눈에 지워진다 하더라도 단 둘이서만 나란한 발자국을 새겨놓자. 그 눈이 조금 더 내려서 온 세상이 하얗게 된다면 눈사람을 만들어도 좋겠다. 마당 한켠에다 장식해두고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마다 인사를 해주자. 그 다음엔 뭘 하면 좋을까. 따뜻한 코타츠에서 몸을 녹이고, 나는 따뜻한 코코아를. 너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그렇게 행복하게 겨울을 보내자. 앞으로 매번 찾아올 겨울과 눈을 단 둘이서 맞이해가자. 어깨위에서 흘러내리는 빨간 목소리를 재차 두르고, 붉게 얼어붙은 손끝을 꼭 쥐었다. 새카만 밤하늘엔 별만 눈처럼 반짝였다.
ㅡ탁한 공기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들이마시고 내뱉을때마다 되려 숨을 죄여오는 듯 했다. 천장 끝까지 서 있는 철조망도, 주위를 막아선 유리벽도 전부 가둬두기 위해 작정하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건너편에 있는 네 모습을 본 순간 여기선 모든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겠구나, 하고. 왠지 모르게 그렇게 직감했다. 몰려오는 불안함이 겉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간다. 그리고 현실이 되어간다. 무슨 잘못이 있어서, 왜 이런곳에서 말도 안돼는 선택을 해야하는지. 왜 우리가 서로를 사이에 두고 닿을수도 없어서 괴로워해야하는지. 그것을 깨닫기엔 들어맞는 이치가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겨우 얽는것이 전부인 네 손가락이 마냥 찼다. 나와 너는 어째서. 우리는 무슨 잘못이 있는 걸까.
천장에서 떨어진 유리조각이 꼬박 하루 넘게 만져보지도 못한 네 얼굴에 상처를 낸다. 얇고 가는 긁힌 자국에서 피가 새어나온다. 네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는건 차가운 겨울바람이면 충분한데. 네게 상처입힐건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어야하는데. 그런데. 그런데 왜. 갈피를 잡지 못한 불합리함은 근본적인 목적지를 찾아내지 못하고 이내 자신에게로 왔다. 역시 나는 차바퀴에 두 다리가 으스러졌을 때, 그때 죽었어야 했나보다. 나는 너와 만나면 안됐었나보다.
이 모든것은 나로 인해 일어난 것이다. 죄악감에 짓눌린 고개가, 어깨가, 등이 무거웠다. 너를 이리도 상처입혀놓은 제가 살아있음을 느낄 때 마다 몸을 짓누르는 그것은 점점 모든것을 잠식해왔다. 공기와 함께 폐에 들어와 심장을 움켜쥐는것 같았다. 나의 모든것을 집어삼키고 있다. 너 마저도 집어삼킬것만 같았다. 안돼는데. 너만은, 너만큼은.
너로인해, 너의 존재 덕분에 참 많은 것을 알았다. 사랑받을 수 있어서, 사랑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너를 만나고 너를 사랑할 수 있어서 찰나의 한순간마저도 잃고싶지 않았다. 밤하늘처럼 새카맣기만 한 내게 너는 빛 그 자체였다. 나와는 다르게 반짝이는 빛. 나를 너와 같이 반짝이게 해준 나의 빛. 내가 존재하는 이유. 나의 모든것. 그런 너를 위해서라면 죽는것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네가 조금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면 나는. 잊혀져도 좋아. 원망을 받고 미움받아도 좋아.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분명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네게 미움을 받아버린다면. 바라보는 시선은 더 이상 따뜻하지 않고 잡아주는 손도 아무리 붙잡으려 해봐도 뿌리쳐질지 모른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손길도, 입을 맞춰주던 온기도 전부 사라져버린다면. 그럴지도 모른다면. 언뜻 스치는 짐작만으로도 덜컥 겁이 났다. 무서웠다. 두려웠다. 그리 받아들인건 아마 자신뿐이었는데도 눈앞이 까마득했다. 울음부터 터져나왔다. 당장이라도 발밑의 모든것들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결국 네게 미안하다는 소리를 들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네 발목을 잡고있는, 네겐 어울리지 않는 볼품없이 새카만 배경일 뿐이다. 찰나의 반짝거림을 얻게 되었다고 해도 나는. 나는 결국. 나는 너를 이다지도 사랑해서 견딜 수 없나보다.
마지막임을 깨닫는것은 생각보다 그리 막연하지 않았다. 그저 영화에서만 보던 총성이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바닥이 빨갛게 물든다. 쇳물을 엎지른듯한 역한 비린내가 눈 앞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너를 다치게한 내가 받는 당연한 벌이었다. 나오는 대로 소릴 낼 자격따윈 없었다. 순간 아득한 의식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씩 스쳐간다. 그래도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바로 내 앞에 있는 너의 모습이었다. 이 고통이 오롯이 자신만의 것이라는것에 가장 먼저 안심이 들었다.
너는. 나를 사랑해주고 내가 사랑하는 너는 나와의 약속을 지켜줄테니까. 부디 원망하고 또 원망해서 나를 잊고 살았으면. 아니야. 나를 기억해줘.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멋진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았으면. 나와 영원히 같이 있어줘. 나와 나눴던 사랑보다 네게 걸맞는, 더 아름답고 반짝이는 사랑을 하기를. 나만을 사랑해줘.
네게 보이지 않게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약속 지켜줘서 고마워요. 주먹 쥔 손에서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행복하게 해줘서 고마워요. 마지막까지 네 얼굴을 보고싶었는데. 고개를 들었지만 애석하게도 눈 앞은 눈물에 번져 부옇게 흐렸다. 네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고통을 느낄새도 없이 의식이 멀어져간다. 채 가시지 않은 화약의 냄새도, 이제는 익숙해진 탁한 공기도 서서히 멀어져간다. 마지막에는 꼭. 사랑한다는 말은 하고 싶었는데.
내가 없는 세상에서도 마지막까지 사랑한 너는 행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