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애들 로스트 아닌데
딸랑, 하고 방울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뒤척이면서 베게 옆에 놓아둔 휴대폰이 밀려나가면서 나는 소리였다. 문득 눈을 떠보면 방안이 꽤나 밝았다. 머리 맡으로 크게 나있는 창문은 오늘도 여전히 커텐이 활짝 걷어져있었고, 옆자리에는 옅은 온기만 남아있었다. 창가에서 스며들어오는 한기에 소라는 덮고있던 이불을 조금 더 어깨위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기다렸다는듯 발이 빠져나오고 말았다. 발가락만 꼼지락거려 이불을 다시 정리해봐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결국에는 늘 그랬듯이 옆으로 돌아누워 몸을 웅크렸다.
이번 여행은 밤기차를 타고 돌아와서인지 일상으로 돌아온 후의 탈력감이 특히 심했다. 바로 엊그제의 일인데도 여행 마지막날의 기억만큼은 마냥 막연하기만 했다. 그때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 하루종일 돌아다녔던것도 지금의 나른함에 한 몫 하는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건 연차를 몰아 쓴 덕분에 앞으로 일주일은 더 집에 있을 수 있다는것과 나기사 역시 한동안은 집에서 푹 쉬고싶어하는 눈치라는 것 이었다.
오늘도 늘 그랬던것처럼 나기사와 함께 보내는 일상일테고, 그것만큼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것이다. 문 밖에서는 잽싸게 일찍 일어난 나기사가 아침준비를 하고 있고, 나기사의 빈자리는 그 애가 꼭 안고 자던 인형들이 대신하고 있는. 그런 익숙함이 평소보다 훨씬 더 그립고, 애틋하고. 그래서 마음이 놓이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역시, 이번 여행은 여러모로 무리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잠이 덜 깬 정신이 서서히 몽롱해져간다. 따뜻한 이불 안에서 오조니에 들어가는 모찌마냥 한없이 늘어지고, 아. 이때 다시 잠드는것만큼 좋은건 없지. 없는데.
"소라쨩 튀김 어떤... 아직도 자는거에요?!"
튀김용 젓가락을 놓고 올 생각도 하지 못하고 문을 벌컥 열어 젖힌 나기사가 단번에 큰목소리를 냈다. 잠결에 베게로 귓가를 꾹 틀어막아봤지만 어차피 소용없는 짓이었다. 정마알~! 소라쨩 잠꾸러기! 젓가락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오늘도 씩씩하게 성큼성큼 걸어온 나기사가 소라의 한쪽팔을 두 손으로 덥석 잡았다. 그대로 일으켜주기위해 쭉 잡아당겼지만, 가뜩이나 졸음에 가라앉은 몸이 움직일리가 없었다. 50cm넘게 체격차이가 나는것도 그랬다. 아침 먹, 어야죠! 힘에 부쳐 잡은 손을 놓아버렸다가도, 나기사는 다시 한번 더 소라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나기가 토시코시 소바 만, 들었는..데..!
목소리가 중간중간 막혀버릴정도로 낑낑거리고 있는데, 나기사의 그 가상한 노력을 봐서라도 소라는 결국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나기사, 나 졸린데... 세수하고 오면 된답니다! 장난을 담아 일부러 시무룩한 척을 해봤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어차피 소용없는 짓이었다.
* * *
털레털레 코타츠에 들어가 탁자위에 엎드리면, 바로 앞에는 나기사가 아닌 해파리가 있었다. 저 든것 없어보이는 동그란 머리에 까맣게 붙어있는 눈을 보자니 인형에 얼굴을 꼭 묻고 좋아 어쩔줄 몰라하던 나기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겨우 말랑말랑한게 전부인 인형주제에 볼수록 묘하게 진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마주보고 있기가 싫어 소라는 엎드린 채 고개만 오른쪽으로 돌렸다. 해파리가 오기 전까지만해도 나기사가 매일 안고다니던 너구리가 있었다. 잘때도 나기사에게 꼭 붙어 둘 사이에 눈치없이 끼어있었고, TV를 볼때도 나기사가 너구리만큼 높이가 좋은건 없다며 왠종일 베고 기대고 끌어안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어쩐지 저 너구리를 안고 낮잠을 자고 있던 나기사의 모습이 떠올라 소라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이번에는 해파리와 너구리가 오기 전 나기사가 늘 데리고 다녔던 토끼와 눈이 마주쳤다. 인형주제에 나기사의 한텐을 입고있었다. 결국 소라는 자세를 바로할 수 밖에 없었다. 어쩐지 조금은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산마 넣을거에요~? 언제나처럼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던 나기사가 소라를 향해 목소리를 냈고, 잠시 생각하듯 고개를 기울이던 소라는 하고싶은대로 해. 하고 대답했다. 나기사가 만든 요리를 먹을 수도 없으면서 코타츠에서 한자리씩 꿰차고있는 인형들을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나기사가 오려면 적어도 요리를 끝낸 다음일테니까, 얼른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튀김은 몇개 먹을거에요? 계란은 몇개 올릴까요? 감주 마실거에요? 하고 재잘재잘 물음이 연이어졌다. 대답을 다 끝내고 소라가 자리에서 일어났을때는 이미 나기사가 쟁반을 들고 온 다음이었다. 쟁반을 받아들고, 탁자 가장자리를 먼저 손으로 짚으며 주저 앉듯 나기사가 자리에 앉자 소라도 그제서야 코타츠안에 최대한 몸을 집어넣었다. 그래도 등이나 팔이 시린건 여전했다. 나기사도 토끼에게 씌워주었던 한텐을 주섬주섬 주워입었다.
마악 만들어서 그런지 아직도 소바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커다란 새우튀김에 작년과는 다르게 유부와 차조기잎 대신 계란 노른자와 꽃모양 카마보코가 올라가있었다. 노른자는 달님이에요! 소라쨩은 특별하니까 달님 두개! 나기사의 말에 결국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번해에는 서로 먹는 양을 생각해서 조금만 만들기로 했지만, 내심 확 줄어든 양이 (물론 이번이야말로 남기지 않고 먹기 딱 좋은 양이었지만) 신경쓰이는듯 나기사는 많이 많이 했으니까 많이 많이 먹으라며 특히 강조해서 덧붙였다. 어차피 남은것들은 점심즈음에 시로나 루리가 놀러와 저녁까지 먹고 가야 겨우 해결할 수 있을게 뻔했다.
"나기사가 만들어준건데 다 먹어야지"
웃으면서 소라가 합창을 하자, 그제서야 나기사도 따라 잘먹겠습니다. 하고 두 손을 모았다.
나기사는 생강으로 맛을 낸 감주를, 소라는 따뜻하게 데운 우롱차를 마셨다. 계란 노른자가 풀어진 국물은 꽤 부드러운 맛을 냈다. 여러번 입으로 바람을 불어 열을 식히거나 위에 올라가있는 튀김을 먼저 먹으면서 시간을 두고 나서야 겨우 면을 먹을 수 있었다. 이번 새우튀김에도 카레가루가 들어갔는지 한 입 베어물면 튀김만의 고소함에 섞여 향신료의 맛이 톡 쏘듯 퍼졌다. 간이 옅은 소바와 의외로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이따 점심에는 오조니 먹어요. 카마보코를 조그맣게 베어 물고 나기사는 면을 집어든 팔을 쭈욱 들어올렸다. 끝이 보이지 않자 자세까지 들어올려 기어코 렌게 위에 수북히 올려놓고 말았다. 밀린 새해음식 다 먹으려고? 토시코시소바도, 오조니도 어쩌다보니 때를 다 놓치고 말았지만 그런건 어찌됐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기사가 함께 있으니까. 늘 그랬듯이 우리는 둘이서 함께 있을테니까.
소라의 장난스런말에 결국에는 두 볼이 빵빵해지도록 소바를 한 입에 넣은 나기사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지 어깨가 들썩거리고 손이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우물거리던 볼은 좀 처럼 줄어들지를 않았다. 나기사, 삼킬 수 있겠어? 여전히 다람쥐같은 얼굴을 한 채 나기사는 괜찮다는듯 자신만만하게 제 가슴께를 팡팡 두드렸지만, 결국 소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찬물 한 잔을 가져다 줘야했다.
새로 들어온 타치바나 해파리의 앞에는 이제는 작년일이 됀 연말 회식에서 간만에 술을 퍼마신 나기사가 사왔던 소꿉놀이 식기 세트가 놓여져 있었고, 코타츠도, 때 늦은 토시코시소바도, 둘이서 맞이한 새해만큼이나 따뜻했다. 부디 이번에도 좋은 한해를 보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