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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겨울인데

렌토상 2016. 1. 16. 03:59






 전국에 폭염주의보가 내렸다는 걸 과시하려는 듯 내리쬐는 햇볕은 쨍했다. 그 열기에 달아오른 공기도 마찬가지였다. 어두우면 그나마 한결 시원하다면서 모든 불을 꺼둔 집안은 마당에서 들어오는 빛에 가구들 그림자만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래도 활짝 열어두니 멀리서 이따금씩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긴 했다. 그것도 한때였지만 없는 것보단 나을 정도였다. 잡초들 사이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훤히 눈에 보였다. 소라는 한 손을 들어 눈가 위에 그늘을 만들어 밖을 바라보던 고개를 그대로 돌려버렸다. 구름 하나 없는 하늘이 눈이 부셔서 였다.




 병아리의 정수리에 꽂힌 손잡이가 돌아가면 안에서 얼음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아스라이 들리는 매미 울음소리에 뒤섞여 밑에 받친 투명한 그릇에는 새하얀 얼음조각들이 쌓여갔다. 그릇의 턱을 넘어가고 산처럼 소복이 쌓였을 때가 되자 나기사는 그릇을 꺼내 소라에게 들어 보였다. 이 정도면 될까요? 너무 많지 않으려나. 부채를 부치던 소라가 짧게 웃으며 대답하자 나기사가 고개를 기울였다. 나기도 이 정도는 먹는걸요! 어차피 남길게 뻔히보였다. 소라는 팔을 조금 뻗어 부채의 바람을 나기사에게로 바꾸며 따라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그건 나기사가 먹는걸로! 응! 핀 없이 옆으로 넘긴 앞머리가 약한 바람에 흔들렸다. 흩부스러진 얼음가루는 어느새 물이 되어 테이블위에 녹아있었다. 




 냉장고에서 방금 꺼냈어도 시럽병에는 금방 물방울이 맺혀 흘러내렸다. 이쯤 되면 자주 해먹는다면서 익숙한 듯 나기사는 두 손으로 집어 든 파란색 병을 과감하게 기울였다. 금세 끈적거리는 파란색으로 물든 얼음이 서로 엉겨 붙어 부슬부슬한 모양을 조금씩 잃어갔다. 본래 얼음의 투명하고 흰빛은 온데간데없이 시퍼런 색이 가득할때서야 나기사는 놓을 생각이 도통 없어보이던 병을 내려놓았다. 대조적으로 윗부분만 초록색으로 녹아든 얼음빙수를 쿡쿡 찌르던 소라는 빙수인지 시럽덩어리인지 모를것을 바라보던 시선을 조금 들어올려 나기사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크게 한입 먹었는지 숟가락을 입에 문채로 찡한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괜찮아? 소라의 물음에 잔뜩 인상을 쓰다가도 나기사는 헤실 웃어보였다. 소라도 따라서 웃었다. 어떻게 먹지 싶었는데 어떻게 잘 먹고있는것 같았다. 두통이 가셨는지 어느새 녹은 시럽이 숟가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빙수를 조심스레 뜬 나기사가 눈을 깜박거렸다. 소라선배, 그거 맛있어요? 시럽들을 가져오면서 쓰다고 멀리했던게 생각나 소라는 그 물음에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먹을만 해. 그 말에도 나기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였다. 말차맛은 어떻게 먹는지 모르겠어요! 질색하며 말하는 작은 손에 들린 걸 먹는 방법이 더 궁금했지만, 소라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차가운걸 먹어도 더위가 가시는 건 한때뿐이었다. 역시나 남겨버린 나기사의 새파란 괴물질은 햇빛을 받아 하늘만큼이나 시원한 파란빛으로 반짝거렸다. 그릇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결국에는 두 사람 다 선풍기앞에 앉았다. 머리가 위를 향해 치켜 올라가있는 선풍기 바람은 소라에게는 맞았지만 나기사에게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아빠가 쓰고 제대로 안 해놓은것같다면서 투덜거리던 나기사가 가슴께의 옷자락을 펄럭거렸다. 그래도 더위가 가시질 않는지 다리를 덮고있던 치맛자락을 쥐었다. 살짝 들어올려져 소리를 내는 치맛자락 아래로 가려져있던 허벅지가 의식하지 못하고 드러났다. 한여름인데도 탄 자국없이 새하얗게 뻗은 다리에 소라는 몸을 살짝 틀어 나기사에게서 등을 돌렸다. 나기사, 잠깐 손 좀. 소라의 말에 고개를 기울인 나기사가 옷자락을 들고있던 손을 치우자, 소라는 그대로 그 무릎 위쪽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팔을 뻗어 선풍기를 낮은 방향으로 맞춰 내리자, 양갈래로 묶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하느작거렸다. 나기사는 어깨를 조금 늘어트리며 배시시 웃었다. 시원하네요! 그러게~ 시선이 마주치자 같이 웃었다.      



 문득 볼 언저리를 간질이는것에 소라는 몸을 틀어 나기사를 올려다보았다. 길게 내려온 환한 머리카락이 먼저 반겨주고 있었다. 햇빛을 받아서 그런지 한층 더 밝아보였다. 소라는 손을 뻗었다. 손에 닿는 감촉이 얇고 부드러웠다. 내려온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다른 한 손도 뻗어 소라는 두 묶음으로 나눠 잡은 머리카락을 어설프게 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내려다 보던 나기사가 작게 소리내 웃었다. 이렇게 하는거에요! 나기사는 잡히지않은 다른쪽의 묶은 머리를 어깨 앞으로 가져와 소라에게 보여주듯 쥐어보이면서 말했다. 이렇게 두개를 먼저 엮고서요, 그 다음에ㅡ.    








* * *




 소리없이 선풍기는 여전히 시원한 바람을 쐬어주고 있었다. 시계는 한참 늘어질 늦은 오후를 가리키고 있었다. 중천에 뜬 해가 조금은 넘어가면서 아까보다는 한층 더 선선한 바람이 활짝 열어놓은 창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나기사는 소라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일어나 소파 위에 있는 쿠션을 가지고 왔다. 그 고개를 살짝 들어 머리 밑에 베게해도 다행히 깨지는 않았다. 잠들어있는 소라의 눈 앞에 손까지 흔들어 보면서 확인한 나기사는 다시 제 자리인것마냥 소라의 팔을 베고 누웠다. 아직 해가 지려면 한참이나 남았으니까, 이대로 조금 더 자도 될 것 같았다. 



 기분좋은 바람과 함께 내걸어놓은 풍경종이 맑은 소리를 내면서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