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어디서 튀어나온지 모를 당돌 유전자
꿈을 꾸었다. 끌어안지 못 할 정도로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 그늘 아래에서, 빈센트는 이젤과 캔버스를 펼치고 눈에 보이는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끝없이 넓은 평야 위로 녹음의 파도가 일고 지평선 너머로는 하얀 풍차가 부드럽게 돌아가고 있는 모습을. 시야의 한켠에는 노란빛의 튤립 꽃밭이 펼쳐져 있었고 눈을 마주치면 한참 화관을 만들고 있던 리베타가 손을 흔들었다. 그 앞에서 엄마의 능숙한 솜씨를 구경하던 비올레타 또한 조금 늦게서야 크게 빈센트를 불렀다. 따라 조용히 손을 흔들어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빈센트는 재차 캔버스로 시선을 두었다. 유화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700번대가 많이 필요할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밝은색들로 빛을 잔뜩 머금어 내리쬐고 있는 따사로운 햇살을,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그리리라고. 시간이 조금은 걸리겠지만 전부 완성 된다면 아틀리에에서도 가장 빛이 잘 드는 벽에 걸어두리라고. 그리 생각하며 유화 나이프를 꺼내기 위해 케이스를 열자, 첫번째 칸에 검지손가락만큼 작아진 비올레타가 쏙 들어가있었다. 갑작스레 들어오는 밝은 빛에 눈이 부신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몸을 일으켜서는, 아직 나이가 어려 발음이 온전치 못한 그 짧은 목소리로...
"아빠!!"
하고 부르자마자 흠칫 눈을 뜨면, 침대아래에서 빼꼼 올려다보는 시선과 마주했다. 정확히는 비올레타의 시선이었다. 제게서 또렷하게 물려받은 밝은 빛의 보라색 눈동자가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는 탓에 그대로 몸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아이는 단번에 높아진 아빠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치켜드는대로 쭈욱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주섬주섬 침대위로 올라가 이불 위를 허우적거리며 지나고서 도착한곳은 아직 자고있는 리베타의 등 뒤였다. 엄마와 아빠의 사이를 비집고 끼어들어서는 아직 잠든 엄마의 이마 위로 손을 올려 열을 쟀다. 다행히 제 딴에는 뜨겁게 느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안도감에 어깨가 내려앉기 무섭게 아이는 매서운 기세로 뒤를 돌아봤다. 이제 막 일어난건 서로 마찬가지였는지 까만 머리가 잔뜩 부스스해져있었다.
"엄마 어제 약 먹었잔아, 그치?"
"어, 응. .. ... 그,렇지"
자다 깬 목소리가 가라앉아 몇번 헛기침을 하자, 비올레타는 보란듯이 입을 삐죽이며 콧김을 흥! 하고 내뱉었다. 마음에 들지 않거나 불만스러울 때 곧 잘 해보이던 버릇이었다. 누굴 보고 배웠는지, 부모인 자신과 리비는 물론 일주일에 한번 만나는 엘리마저도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필립? 제이슨? 몇몇 친구들을 떠올려봤지만 출처는 불분명했다. 별안간 심통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뜨던 아이는 낮춘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며 속삭였다.
"뉴스! 벌써! 끗! 났다구!"
단어의 사이사이마다 힘을 주다보니 저도모르게 마지막에는 힘이 더 세게 들어간모양이었다. 그와 동시에 세게 내리쳐버린 두 손에 애꿎은 리베타만 정통으로 팔을 맞아버리고 말았다. 어지간히도 놀랐는지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벌떡 일어난 안색은 어젯밤보다 몇배는 더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영문 모를 통증에 웅크리고 있자, 비올레타는 어쩔줄을 모르고 입을 합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상황 설명과 함께 약기운이 아직 깨지 못한 리비를 다시 재우고, 둘이서 조용히 침실을 나가는건 역시나 빈센트의 몫 이었다.
엄마 화났쓰까? 나중에, 일어나면... 제대로 사과하자. 거의 울기 직전의 얼굴을 크게 문질러주며 달래놓고보면, 요란하긴해도 정신이 확 깼다. 이제서야 느지막히 울리는 휴대폰의 알람을 끄고 빈센트는 주방으로 향했다. 넓게 내어놓은 거실 창문으로 이른 아침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고 있었다. 아, 어딘지 익숙했다 했더니. 늘 보아왔던 풍경이 어김없이 꿈에 나타났던 모양이었다. 훌쩍임을 그치고 아빠의 뒤를 졸졸 따라온 비올레타는 조리대 아래에 있던 발받침대를 끌고 빈센트의 옆에 섰다. 있지, 오늘 날씨 좋치? 점심먹고 나갈거야? 아니면 레티는 메이시네 집가서 놀거야, 가서 메이플을 산책 시키기루 했거든. 아빠의 침묵이 무시가 아님을 알고있기에 연신 종알거리기 바쁜 비올레타의 손에 빈센트는 어린이용 주방칼을 쥐여주었다. 도마를 내려 아이의 앞에 놔주고 냉장고나 선반에서 아침재료를 하나씩 꺼내놓았다. 식빵과 계란, 버터, 간단한 샐러드를 위해 미리 손질해놓은 야채들. 그정도를 내려 놓으면 비올레타는 알아서 제 할당량을 가져가 야채를 썰기 시작했다. 아, 맞따. 나도 참! 메이플이 뭔지 안 안려줬잖아? 야채가 울퉁불퉁한 모양으로 서투르게나마 조금씩 조각나갔다. 메이플은 강아지야, 메이시네는 되게 조아. 그치만 메이시네 엄마는 따른 나라말을 영어밖에 할 줄을 몰라. 간간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빈센트가 덧붙였다. ... 오늘은, 야채 틀 안쓸거야...? 오늘은 그냥 썰고 시픈 기분이야. 아이는 금세 또 말을 이어갔다.
"근데 아빠, 어제 내가 메이시네 집에 놀러갔잔아"
조리대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인덕션의 불을 올리고, 달궈지는 프라이팬에 버터를 두르고. 식빵의 모서리를 따로 덜어놓으면 조그만 손이 한웅큼을 집어갔다. 발꿈치를 최대한으로 들어 내밀어주는걸 얌전히 받아먹었다. 두리서 핸드위히를 머호 이어은데~. 레티, 다 먹고 얘기해도. 괜찮으니까... ... 아이는 열심히 입을 우물거리며 폴짝 받침대위에서 내려와 식기 건조대쪽으로 향했다. 가는길에 요령껏 입가에 묻은 빵가루를 문지르다시피 털었다. 그리고 엎어져있던 커다란 샐러드볼을 두손으로 가지고 돌아오며 아침 식사전의 간식을 꿀꺽 삼켜넘기기 무섭게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메이시네 아빠가 일찍 집에 왓단말야?
"그러구 인사를 뽀뽀로 하던데?"
그 집도 꽤나 사이가 좋은 것 같네. 소리내지 않은 짧은 감상과 함께 삼각형으로 자른 식빵을 나란히 올리고, 불을 약하게 줄였다. 비올레타는 한참 양상추를 그릇 안에 뜯어넣고 있던 참이었다. 등을 돌리고 있는 아빠를 올려다보던 아이는 손을 탁탁 털어낸다음 성큼성큼 받침대를 내려왔다. 그러구! 인사를! 뽀뽀로! 하던데? 이번만큼은 대답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고개를 치켜들고 아이는 한번 더 콧김을 킁! 하고 내뱉었다. 있짜나 근데!
"우리집은 왜 안 그래?"
행여나 저를 닮아 너무 얌전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던 리비의 말이 떠올랐다. 그에 저 또한 동의하던 기억이 났다. 이런 환경에서도 그 걱정이 무산할정도로 당차고 씩씩하게 자라준건 오히려 고맙기까지 하지만... 문제는 제게 있었다. 아이의 거침없는 화법은 언제나 기상천외하게 예상을 깨곤했고, 도무지 지칠줄을 모를때마다 어떤 반응을 보여줘야할지 생각이 턱 막혀오는듯 했다. 리비가 아직까지도 유아 관련 책을 놓지 않는걸 보면 새삼스럽게도 아빠로서의 제 부족함이 실감되고 그리고... 부담감이 느껴지는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빈센트는 일단 토스트를 뒤집었다. 조금은 태워버리고 말았다. 다시 뒤집기로 했다.
"...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
그, 아빠하고 엄마는. 많이 사랑하고 있으니까... 물론 원체 그러했던 가라앉은 원래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대답이긴해도 나름대로 아이를 위한 옳은 대답을 했다. 시간을 들여 조심스러우면서도 천천히, 적어도 앞 문장의 일부만큼은 진심이라 할 수 있었지만 언제가 되어도 이런 류의 말은 영 어색할따름이었다. 아빠의 말이 끝맺기를 기다리던 비올레타는 흐음, 하고 짧은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어른도 보여주지 않을 도도한 반응에 멋쩍음과 민망함은 빈센트가 맡아야해야 했다. 비올레타는 그런 아빠를 개의치않고 발받침대를 크게 딛으며 말했다.
"엄마하고 아빠는, 숫기없는 감자구나?"
숫기, 감자... 들어보지도 못하던 조합에 빈센트는 가만히 아이를 바라봤고, 할일을 끝낸 비올레타는 다시금 그릇을 두 손으로 들었다. 몸을 잔뜩 기울여 내려다보는 걸음이 한결 조심스러웠졌다. 그치만 그런 감자 아빠도 사랑해, 레티가 대신 뽀뽀해줄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주장의 흐름에 어떻게 반응해야 아이가 좋게 넘어갈 수 있을지 잠시 고민하던 때였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비올레타는 엄마에게로 와락 안겨들었고, 그 작은 무게도 버티기 버거워 결국 바닥에 털썩 앉은 리베타가 아이를 마주 안았다. 파고드는 탓에 자세가 기울어지면서도 리베타는 잠이 덜깬 목소리로 소리내 웃었다.
"Peut-on être malade, Maman?"
"Ça va maintenant, merci Reti."
익숙하면서도 조금은 낯선말이 오갔다. 그러니까, 아픈건 괜찮냐고 물어봤고. 리비는 괜찮아, 고마워 레티. 하고 대답했고... 밑이 조금 타버린건 제 몫의 접시에 두고, 마저 올리는 토스트는 둘의 몫이니만큼 조금은 신경을 써 굽기로했다. 대화에 집중하다보면 조금씩 그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팔 안아파? 레티가 뽀뽀해줄게. 하나도 안 아파요~ 엄마 다 나았는걸? 저렇게 뺨을 부비적거리고 애교를 부리는 걸 보면 아직 어린애가 맞긴 한것같은데. 가끔 너무 어른 -정확히는 약간 아주머니 정도-스러운 말을 하는 걸 보면... 리비를 닮아 똑똑해서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식탁위로 몇몇 접시들을 옮겨놓자, 비올레타가 크게 소리쳤다. 아빠!
"왜 엄마한테 뽀뽀로 인사안해?"
한다면서! 아까 나하고 약속 해쓰면서! 느닷없는 소리에 당황해버린건 리베타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의 머리를 단정하게 묶어주던 손이 풀어지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리베타가 되물었다. 아니... 둘이, 무슨 얘길 했길래... 말 한마디도 오고가지 않을정도로 한순간에 어색해져버린 엄마아빠를 두고, 비올레타는 기세등등하게 포크를 챙겨들고 자리에 앉을 뿐이었다.
* * *
「빈, 잠시만...」
이질적인 발음에 고개를 들면 작업할 때 쓰던 안경을 채 벗지 못한 리비가 노트북을 들고 앞에 앉았다. 아이와 네덜란드 어를 제외하고도 둘이서 이야기할때는 프랑스어를, 때로는 영어마저도 곧 잘 대답해주던 리비가 유일하게 먼저 알려주지 않는것은 한국어였다. 어차피 더 이상은 갈 일이 없을테니까, 발음 체계나 언어구조가 비슷한 말이 아니라면 혼란스러울거라며 그 대신 비올레타가 들을 필요가 없는 말을 해야할 때 쓰기로 결정했다. 그렇다보니 주로 건강이나 금전과 관련된 상황에서 쓰이는 만큼 최대한 알기 쉬운 단어로 천천히 말해주면, 조금 오래전이기는해도 길게 배웠던 덕분에 막힘없이 들려오고는 했다
안경을 고쳐쓰고 리베타는 노트북 화면을 반대로 돌려주었다. 화면을 가리키며 말하려했는지 살짝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팔을 뻗었지만, 이 각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걸 그제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구태여 말 하지 않아도 빈센트는 조용히 옆으로 옮겨앉아 자리를 만들어주었고, 가벼운 감사의 표현과 함께 리비가 천천히 일어났다. 「가게 인테리어 말인데요, 예전에 잠깐 얘기했던게, 오늘 연락이 와서, 이야기 해보니까...」 옆이 채워지면, 빈센트는 상대적으로 제 앞에 놓여있었던 노트북을 가운데로 오게끔 밀어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 말고 더 많이, 필요할 것 같아서...」 「음. ...예,산이?」 「네, 맞아요. 그래서 여길, 이렇게...」 자연스럽게 평면도를 띄우고 있는 화면에 집중하다보면 기울어진 어깨가 서로 맞닿았다. 누가 먼저랄것없이 사과하며 바로 거리를 두었던것도 잠시, 조금 어색하게나마 리비의 고개가 먼저 기울어지고 이내 빈센트의 어깨에 기대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어깨위로 흘러내리는게 느껴졌다. 그리고, 리베타 특유의 부드럽고 따스한 체향 또한. 먼저 그렇게 다가왔음에도 새삼스러운 어색함과 부끄러움이 드는건 리비도 어쩔 수 없었는지, 제대로 할 말을 꺼내지 못할 때였다.
"엄마! 아빠!"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 그림을 그리고있던 비올레타가 별안간 두 사람을 불렀다. 입을 삐죽이며 콧김을 세게 내뱉은 덕분에 바로 아래에 있던 과자 봉투가 팔랑 날아갔다. 입은 삐죽였고, 눈썹은 잔뜩 올라가있었다.
「왜 나, 아니고 얘기,해?」
옆을 보면, 리비는 끌어당겨지는 것 마냥 스르륵 자세를 일으켜 멍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리고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보려고 화면을 가리키고 있던 손도 애매하게 내려가버리고 말았다. 적어도 아이를 상대할 때 만큼은 늘 긴장상태를 지키면서 꽤나 침착했었던 것 같았는데. 어안이 벙벙해진채로 평소와 다름없이 말까지 더듬으며 리비는 테이블 바깥쪽으로 몸을 기울여 아이를 바라봤다. 어,엄마아빠가 방금한 말... 어디서 배웠어? 그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아이는 뒹굴 몸을 돌려 널브러지게 드러누웠다. 차암나, 누구긴 누구야! 엄마지! 발을 허공에 동동 구르며 기분좋게 꺄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히, 오직 5살짜리 여자아이 딱 한명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