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 괴담글쓰기

2021. 2. 8. 03:39 from LOG

 

 

 

 자율연습이 끝나고 집에 갈 준비를 할 무렵부터 갑작스럽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체육관이 산을 등지고 있어 개구리며 풀벌레 소리가 꽤나 요란스러웠다. 부원 하나가 문을 잠깐 열어보더니 이거 장난 아닌데, 하고 질색하며 뒤로 물러섰다. 예상치 못한 소나기 주제에 얼마나 매서운지 체육관 불빛에 비춰진 빗줄기가 새하얗게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가로였다. 다른 한명이 얼른 바닥 닦는 대걸레를 가져와 그 잠깐에 체육관 안으로 흥건하게 들어온 비를 닦기 시작했다. 세이류 녀석들, 걔넨 체육관이 학교에 있으니까 우산도 빌릴 수 있겠지! 그 두사람을 거들며 투덜거리는 H의 큰 목소리에 나기사와 함께 비품을 정리하던 T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쨩, 우리 우산 없던가?" 
 "아 그거~... 저번에 칼싸움하다가 다 망가진거 있죠..."

 나기사가 눈썹을 늘어트리며 곤란한듯이 웃더니 얼른 화제를 다른곳으로 돌렸다. 그 칼싸움의 주축이 바로 자기였던게 내심 찔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정도의 폭우속에서 산을 내려갔다간 겨우 뒷산이라도 100% 조난이다. 가까운 계단으로 내려가 바깥 도보길로 빙 돌아가는 방법이 있지만 길이 너무 멀고. 애초에 우산도 없지만 말이다. 다행이 1시간 뒤면 그칠 비라는 뉴스가 뜨긴 했지만 지금 당장은 체육관에 발이 묶이게 됐다. 마지막으로 소라가 옷을 갈아입고 탈의실로 쓰는 사무실의 문단속을 마치고 나오자 일단은 기다려보고, 비가 너무 그치지 않으면 여기서 집이 제일 가까운 나기사와 E의 집에서 우산을 잔뜩 빌려 돌아가는것으로 결정된 분위기였다.

 그 중 오늘 누나가 결혼할 남자친구를 데려오는 날이라 저녁밥으로 특제 게전골이 나오는데 빨리 가지 않으면 바닥에 깔린 무만 먹게 될지도 모른다는 K만이 가방을 같은반 E에게 맡겨두고 빗속을 전속력으로 내달려갔다. K의 용기를 응원하고 부디 내일 감기로 결석하지 않기를 바라준 뒤 각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더니 자연스럽게 체육관 한 가운데에 옹기종기 모여앉게 됐다. 원형으로 둘러 앉은게 완전히 합숙분위기가 따로 없었다. 나기사는 물론 소라의 옆에 앉았고 그 애의 오른쪽엔 자연스럽게 T가 앉았다. T는 몇몇 결원이 생겨 2학기가 되고 새로 들어온 1학년인데, 그 전까진 온통 남자밖에 없던 배구부에 같은 학년에 같은 여자, 게다가 매니저가 들어오니 나기사로서는 기쁘지 않을수가 없던 모양이었다. 부에 남자친구가 있는데도 말이다. 역시 조그만 애들끼리는 뭔가 통하는게 있는지 T는 낯가림도 많고 조용한데 나기사하고는 금세 친해져 며칠만에 상당히 사이가 좋아졌다. 그 동안 줄곧 매니징을 혼자 맡게 된게 내심 부담이 컸는지 T가 들어오고 한시름 놓았다는 나기사의 말에 소라도 T가 들어와준게 다행이다 싶었지만... 부활동 시간에 나기사를 종종 잃어버리게 된건 그러니까, 질투라기보단 조금 시무룩해지는 것이다. 나도 나기사랑 얘기할 수 있는데, 나기사하고 등하교도 매일 같이하고 주말 데이트도 나기사가 T와 놀러가는것보다 훨씬 많이 하고 시험기간이면 곧 잘 집에서 공부도 같이 하는데. 조금 붙어앉아도 되나 싶어 나기사를 바라보자 한참 T에게 무어라 귓속말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고선 소라를 돌아보더니 개구지게 웃으며 선배, 나기가 좋은거 가져올게요! 하며 T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라도 충분히 나기사랑 좋은걸 가지고 올 수 있는데 말이다. 무거우면 같이 들어줄까, 하려 했더니 이미 여자들끼리 사무실로 쏙 들어가고 없었다. 이 기분은, 그러니까 그거다. 나기사가 가끔 집에 놀러올때면 시로와 둘이서 여자들만 아는 말을 하면서 꺄르르 웃느라 혼자 황망히 남겨졌을때의 그 기분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표정이 변한것도 의식하지 못해서 왼편에 앉아있던 A가 조심스럽게 표정이 왜 이리 심각하냐고 물었다. 그제서야 적당히 별 일 아니라며 웃어넘기자 사무실로 갔던 두 사람과 다른 1학년 몇몇이 소란스럽게 돌아왔고, 나기사가 기세좋게 주목! 하고 외치는 바람에 모두가 그쪽을 바라봤다. 언제 사무실에 가져다놓은건지 분명 아까 확인했을때까지 본 적 없던 과자들을 한가득 끌어안고 있었다. 여기 있는 것들이라곤 다같이 회식이라도 갔다간 가게 사장님이 기겁을 하고 고문이 속 깊이 끌어올린 한숨을 쉬게하는 운동부 남고생들이 아니던가. 먹을게 앞에 있으니 상하관계에 상관없이 누구는 과자 포장지를 넓게 뜯어 늘어놓고, 누구는 종이컵을 돌리거나 체육관 입구 옆에 있는 자판기에 음료수를 뽑으러 갔다. 역시나 나기사가 가장 열심이라 소라도 옆에서 거들 수 밖에 없었다. 한참 왁자지껄한 와중에 누군가 말했다. 야, 누가 여기다 손전등 놨냐? 정전도 안 났는데.

그 순간 기다렸다는듯 체육관의 불이 한번에 꺼졌고, 다들 입구쪽을 돌아보자 그곳에는 Y가 있었다. 스위치를 단번에 꺼버린 그 큰손을 내리며 Y가 음산하게 웃었다.

"여름엔 역시... 괴담 아니겠슴까."

 

 


 부활동은 이미 진작에 끝났으니 3학년들이 제지할 이유도 없고, 나기사는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했다. 겁이 많은 몇몇은 벌써부터 귀를 막거나 옆에 앉은 사람에게 찰싹 붙어 웅크려 '안들린다'를 반복하기 바빴다. 비오는 날, 한밤 중 부원들 말고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산너머의 체육관에서 누군가의 "귀신 얘기를 하면 자기 이야기 하는걸 듣고 귀신들이 쫓아온다는데..."라는 한마디를 시작으로 괴담들이 하나둘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제대로 된 이야기를 꺼낸건 당연 Y다. 2학년 윙스파이커인 Y는 손전등이 제게로 오자 불빛을 턱 아래에 비추며 숙이고 있던 고개를 치켜들어 분위기를 무섭게 잡았는데, 생긴게 워낙 웃긴 빡빡머리라 긴장한 사람들은 예의 겁쟁이들과 1학년인 H, 그리고 괴담이라면 자다가도 눈을 번쩍 뜰 나기사 뿐이었다.

 "이건 내 중학교 친구의 누나가 겪은 일인데..."

 하고 괴담이 시작됐지만 Y의 표정때문에 애써 웃음을 꾹 참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나기사는 두 손을 꼭 쥔채 인상을 쓰며 괴담에 있는 힘껏 집중하고 있었다. 꿈속의 꿈에서 무심코 '이건 꿈이지?' 따위의 말을 했더니 꿈속의 사람들이 갑자기 소름끼치게 돌변해 '너만 꿈이겠지' '지금 이게 꿈인것 같아?' 같은 말을 하고 어떻게 저떻게 되었다가 꿈에서 깬다는 전형적인 괴담이었다. 도입부만 들어도 결말까지 한번에 알것같은 흔한 이야기를 Y는 엄청나게 부풀려 말하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실감나게 말하는것 같지만 이야기에 맞춰 경악했다가 심각해졌다가 하며 시시각각 변하는 나기사의 얼굴이 훨씬 더 재미있어 소라는 그 옆모습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역시 귀엽다.

 괴담의 중간부터 Y의 시선이 은근슬쩍 주변을 쭉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도 얼굴 아래에 손전등을 대고 있어 눈 크기에 비해 작은 눈동자가 굴러가는게 확연히 보였다. 마지막 부분에 타겟을 하나 잡아 깜짝 놀래키며 끝날게 뻔한데 숨까지 참고 괴담에 푹 빠져버린 나기사가 그걸 알 턱이 없었다. Y는 T의 옆에 앉아있었고, T는 세운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귀를 연신 눌렀다떼며 안들린다를 연발하는 상태였기에 Y의 표정이 더더욱 음산해지며 나기사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기회를 봐서 얼굴을 들이민다거나 큰소리를 내며 깜짝 놀래킬 모양이다. 거리도 가깝고, 나기사라면 엄청난 목소리만큼 리액션도 대단하니 놀리기 딱 좋은 대상이란건 알지만 소라는 왠지 나기사가 다른사람에 의해 깜짝 놀랄게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Y가 잠시 다른곳을 보고 있는 사이 한손으로 조용히 나기사를 끌어다 제 무릎위에 앉혔다. 어깨위로 팔을 걸쳐 목둘레를 꼭 둘러 끌어안고 조그만 정수리에 턱을 기대자 키가 줄어든다고 불평은 해야겠는데 괴담은 들어야겠고, 결국 잠깐 당황하여 꼼지락거리기만 할 뿐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다시 Y가 고개를 돌렸을땐 나기사가 있던 자리에 소라가 있으니 한순간에 시선이 흔들리는게 역시나 보였다. 3학년 선배까지 깜짝 놀래킬 배짱은 없나보다. 그래도 용케 이야기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으며 Y는 이내 "너만 꿈이겠지!!"를 외치며 맞은편에 있던 H를 향해 두 손을 번갈아가면서 재빠르게 기어가듯 튀어나갔다. 윙스파이커 답게 바닥을 손바닥으로 연달아 쳐대는 소리가 어마무시하게 체육관에 울렸고, 다들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H는 뒤로 나자빠져 몇차례 데굴데굴 구르고 말았다. 소리에 깜짝 놀란 나기사도 꺅 비명을 질렀다. 소라도 조금 놀라 어깨를 흠칫했다. 다른건 아니고 밖에서 천둥이 친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 * *

 

 


 "다음은 나기에요!"

 차례가 몇 번 돌다 이번에는 나기사가 손전등을 잡았다. 불을 꺼서 어둡기도 했고, 부원들이 그다지 보지 않으니 여태껏 계속 소라의 무릎 위에 앉아있었지만 주목을 받게 되자 주섬주섬 내려와 소라의 앞에 앉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건 아쉬워도 나기사의 뺨이 만화 캐릭터처럼 절묘하게 보이는 각도가 꽤 마음에 들어 그대로 있기로 했다. 무서운 얘기를 하면 귀신이 따라오니 잿밥을 바쳐야 한다며 슈크림 과자를 우물거리느라 그 뺨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분명 진지하고 열심히 괴담을 얘기할 나기사에게는 미리 미안하지만 여전히 그 애를 내려다보는게 훨씬 재미있었다. 음료수까지 마시고 나서야 나기사가 손전등을 껐다 켰다. 딸깍이는 소리와 빗소리만 체육관에 메아리 쳤다.

 "다들... 역 앞에 육교 알죠?"

 나름 목소리도 잔뜩 내리깔았는데 여전히 얇아 그저 어린애 같았다. 아니면 화난 강아지나 심각한 햄스터나 뭐 그런것들이 연상되고 말았다. 나기사는 부쩍 평소보다 차분해진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실은 그 육교가 완공되기 전에 살인사건이 있었대요"
 "그때도 이렇게 갑작스레 심한 소나기가 퍼붓는 날이었는데, 우산이 없던 여학생이 급하게 집으로 가려다 뼈대는 만들어졌지만 아직 출입금지였던 그 육교를 건너기로 한거에요"

 슬슬 비가 그쳐갈 즈음이라 그런지 이따금씩 들려오던 소근거림이나 과자를 먹는 소리도 왠지 들리지 않았다.

 "빗소리 때문에 그때까지도 누가 뒤따라온가는걸 눈치채지 못했고... 결국 육교 위에서 토막나 살해당한거죠. 범인은 시체를 육교 아래, 아직 아스팔트 도로가 깔리기 전인 흙바닥 여기저기에 묻어놓았고 경찰은 그 학생의 머리와 몸통, 팔 밖에 발견하지 못해서 그렇게 장례를 치러줬대요. 그래서..."

 나기사가 숨을 한번 쉬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가끔씩 육교위에서 그 학생이 귀신이 되어 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고 해요. 비정상적으로 길게 목을 빼서, 자신의 없어진 신체가 다리 아래의 어디에 묻혀있나... 찾는거죠"
 "나.. 그 이야기 들어봤어"

 문득 S가 손을 들었다.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힛쨩하고 나는 이 마을에서 꽤 오래 살았잖아, 이거 진짜 유명한 괴담인데. 이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꽤 많이 목격했고 제 여동생도 본적있다며 S가 말했다.

 "내가 초등학생일땐 머리와 몸통, 팔 한쪽만 있는 귀신이었는데 중학생땐 팔 한쪽을 더 찾은것 같아. 시간이 지날수록 그 귀신의 모습이 완전해져서, 이젠... ..."
 "다리 한쪽만... 남았대요"

 나기사가 그 뒤를 이어 말했고, S도 그렇게 알고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리 까지 다 찾게되면... 그 아이는, 그 귀신은 어떻게 되는걸까요?"

 그 누구도 대답을 꺼내지 않았다. 빗소리마저 미약해져 침묵만이 스산하게 감돌 뿐이었다. 한참뒤에 T가 우는 목소리로 이제 육교 못 건넌다며 울상으로 고개를 들었고, 지하철 등교인 A는 내일부터 버스 통학으로 바꿀거라며 선언했다. 한두마디가 터져나오자 분위기는 금방 누그러졌고 때마침 H가 비가 그쳤다며 재빠르게 일어나 체육관의 불을 켰다. 주변이 한껏 환해지며 간식들로 잔뜩 어질러진 주변이 보이자 이번에도 부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구는 과자봉투를 정리하고, 누구는 쓰레기통을 가져오고, 누구는 왜이렇게 바닥에 가루가 많냐며 턱에 구멍 뚫린 사람 나오라고 장난을 쳤다. 가루가 쏟아지지 않게 꼼꼼히 과자 봉투를 접어 정리하던 나기사는 소라를 올려다보고는 두 손을 제 허리위에 올려 어깨를 쭉 폈다. 당당함 그 자체다. 괴담천재 나쨩이라고 불러주세요! 자랑스레 말하는 얼굴에도 뿌듯함이 가득했다.

 

 

 


 비가 그쳤어도 흙이 잔뜩 젖었으니 소라와 나기사는 산을 곧바로 내려가 도보길로 돌아가기로 했다. 자전거를 끌고 계단을 내려가는게 좀 위험하긴 했지만 크게 미끄러지는 것 없이 무사히 나기사의 집 근처 골목길에 도착했다. 나기사가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소라는 젖은 앉장을 손수건으로 대충 닦아낸 뒤 올라탔다. 덜마른 비내음이 아직 여름이 가시지 않은 밤공기에 섞였는데도 유난히 차고 눅눅했다. 이렇게 비가 퍼부었으니 내일부터는 날씨가 좀 차겠지, 자기전에 춘추복을 꺼내고 시로의 교복도 미리 다려놓고 루리의 겉옷을 준비해줘야겠단 생각을 하며 나아갈때였다. 문득 떠오른것이다. 이 길로 가면 그 육교를 지나서 가야했다.

 소라는 귀신을 본적이 없다. 친척들 중 영감이 강하다거나 그런 쪽의 눈이 트인 사람이라곤 있을리가 없고 가위 한 번 눌려본 적도 없었다. 악몽이야 몇 번 꾼적있지만 그게 귀신과 관련될리 만무하고, 애초에 그런걸 믿지도 않으니 말이다. 귀신이라하면 결국 일종의 헛것이나 우연이 아닌가. 일본은 섬나라라 귀신이 물을 건너지 못해 그 안에 갇혀 득실거린다는데, 그렇게 따지면 사방천지가 다 귀신밭이란 소리고 가족도 그렇게까지 같이 지내진 못할거다. 즉, 있어봤자 별다른 감흥이 들진 않는다는 뜻이다. 그딴것보다 부모님이 예정과는 달리 늦게 집에 올것같단 전화나 단단히 삐진 나기사가 좀처럼 화를 풀지 않을때가 더 무서울 것 같았다. 제대로 삐진 나기사는 아직 본 적이 없는데, 그것도 나름 귀엽겠다 생각하며 페달을 밟았다. 저 멀리서 예의 육교가 보였고, 소라는 앞을 바라보던 고개를 들어 그 위를 바라봤다.

 

 누군가 서 있었다.

 

 하교 시간은 물론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도 훨씬 지나 역 근처는 물론 길가에도 인적은 드물었고, 오직 소라 혼자만 물기 남은 길을 가던 중이었다. 평범한 흰 셔츠에 회색 체크무늬 스커트를 입고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 된 학교의 교복이다. 우산이 없었는지 흠뻑 젖은 등에 까맣고 긴 머리카락이 구불구불 달라붙어 있었지만 무언가 찾고 있는듯 그 자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 모습이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만 있는줄 알았는데, 난간을 붙잡지도 않고 그 위에 걸쳐지듯이 아주 깊게 허리를 숙이고 있는 것이었다. 페달은 계속 굴러가 주변 조형물이 시야에서 벗어나자 가려져있던 다리의 모습이 드러났다. 까치발로라도 바닥에 딛고 있어야할 다리는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게 단 한쪽밖에 없다는걸 인식하자마자...
 어쩐지 이대로 계속 보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라는 고개를 육교 반대쪽으로 돌린 뒤 페달을 훨씬 빠르게 움직였다. 습한 바람이 온 몸에 달라붙어오는 감각이 이상하리만치 선명해 마냥 불쾌하고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피곤한 모양이다. 날도 어둡고, 비가 그치긴 했어도 주변이 흐리니 누군가 헌옷이나 쓰레기 같은걸 난간에 걸쳐놓은 것을 순간 잘못 봤을게 당연했다. 집에 가면 씻고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마셔야겠다 생각하며 소라는 빨간불이 잡혀있는 신호등 앞에 다다르고서야 속도를 줄여 이내 멈춰섰다. 혹시 몰라 다시 육교 쪽을 돌아보자 그 자리에는 끝에 비닐봉투 같은게 달린 무언가가 길게 늘어져있을 뿐 이었다. 뭐야, 역시 잘못봤네. 조금 맥이 빠졌다. 소라는 한쪽 어깨에 메고있던 가방을 고쳐멘 뒤 단단히 핸들을 잡으며 앞을 바라봤다.


 불이 바뀌었다. 소라는 사람없는 횡단보도를 자전거를 탄 채 건너 집으로 향했다.

 그것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다.

 

 

 

Posted by 렌토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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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여봐요 이주도의 섬

2020. 4. 13. 02:49 from LOG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짙다. 더운바람이 부는 것 같아 오늘은 주머니를 깊게 낸 반바지에 품이 큰 티셔츠를 입기로 했다. 사부작거리는 린넨 특유의 착용감이 시원하다. 현관 앞에서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은혜는 어깨에서부터 시작해 느슨하게 머리카락을 묶었다. 목둘레가 드러나는건 아직 부담스러워 날개뼈를 지나도록 잘랐지만, 그래도 끝이 짧은게 영 낯설기만 했다. 챙아래 눌려버린 옆머리를 건성으로 매만진 뒤 문을 열었다. 때마침 기분좋게 바람이 불어 기지개를 쭉 펴봤다. 하늘이 눈부시다. 그리고 조금 더웠다. 

 

 

 낚시가방을 어깨에 둘러메며 현관문 옆으로 세워 둔 접이식 의자와 양동이를 한 손으로 잡아들었다. 벌써 준비가 끝이다. 남들은 부력망이네 태클박스네 온갖 짐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녔지만 낚시대 한 자루만 중고로 싸게 넘겨받은 은혜는 마냥 손이 가벼웠다. 가방 안의 한쪽 면으로는 전용 릴이 하나. 나머지 바늘이나 원줄 및 쇼크리더, 루어 따위는 하나 둘 얻어모은것으로 전부였다. 허나 요컨대 은혜에게 낚시란 흔한 '여가생활'에 가까웠다. 파리같은 무지개빛 선글라스를 쓰고 시꺼멓게 피부를 태우면서도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열정가이들과는 차원이 다르기에 잡히면 잡히는대로 아니면 마는대로. 따사로운 볕이 바르는 아래에 앉아 느지막하니 단잠을 졸고 소금바람과 함께 못다한 책을 읽으며 여유를 느지막하니 즐길 뿐이었다. 덕분에 방 한켠에 가득 밀린 책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시간도 잘 흘러갔다. 이만치 평화로운 노후생활이 또 있으랴.

 

 

 

 두어칸짜리 계단을 내려가 집을 나선다. 저번 낚시에서 완독을 했기에 책은 챙기지 않도록 한다. 특별히 어느날이라고 달라지는것은 없다. 가끔 캔맥주를 사거나 캔 땅콩 따위의 간식거리를 사들고 골목에서 마주치는 아는 얼굴과 인사를 하다보면 부둣가는 금방이다. 새벽동안 어선이 빠져나가고 바다를 찾는 사람들은 전부 해안가로 향하니 인적은 드물다. 그중에서도 최대한 안쪽으로 들어가면 팔걸이까지 걸려있는 고급 낚시의자 두채가 있었다. 오늘 멤버는 수선집 맞은편에서 세탁소를 여는 아저씨들이다.

 

 둘은 장인과 사위 관계인데, 자동차 사고로 다른 가족이 전부 죽어 결국 이주도로 왔다 했다. 그런것치고는 사람을 곧 잘 친근하고 예의바르게 대할줄 알아 섬전체와 우호적이었다. 이주도에서 나름의 장점을 꼽자면 낙후된 섬이라는것에 비해 젊은 사람들이 많은 편이고, 죽지 못하거나 혹은 죽기 위해 찾는 곳인만큼 극히 개인적인 성향들을 띈다는 것이었다. 그들처럼 사교성이 좋은 부류는 드물다. 즉, 어쩔 수 없는 부분은 있지만 적어도 '여자가 알지도 못하면서' 라던지 '여자는 부정을 타서' 같은 비위상하는 말을 나불거리지는 않는단 뜻이었다. 폐쇠적인 시골인만큼 이정도라면 어울리는데에 있어 감수할만했다. 실제로도 그러했고.

 

 

 사위는 영재 아저씨라 부르고, 장인은 사장이라 했다. 둘은 은혜가 약사 가운을 입고 있지 않아도 꼬박꼬박 '선생'이라는 표현을 붙였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의자를 펴면 사장이 선글라스를 벗고 아는척을 했다. 약사 선생 왔는가? 의자에 앉자마자 은혜는 다리를 쭉 폈다. 어떻게, 많이 좀 잡았어요? 아저씨가 옆에 둔 스트로폼 박스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오늘 선생님도 좀 잡겠는데요. 너스레에 빼꼼 고개를 내밀어보면 얼음이 둥둥 떠있는 통안에 회색 생선들이 가득했다. 짧은 감탄사가 절로나왔다.

 

 오늘은 캐스팅부터가 완벽했다던지 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들으며 은혜는 낚시대를 꺼냈다. 손잡이의 홈에 릴을 꽂고 마저 아래를 돌려 고정 한 뒤 남은 피스를 끼웠다. 줄을 빼내 가이드에 통과시키고 바늘을 끼우려는데 사장이 벌떡 일어났다. 야이, 이놈 빵이 장난아니다. 다급한 목소리만큼이나 크게 휜 낚시대가 팽팽하다. 무릎을 구부리고 한쪽 발을 뒤로 빼내며 있는 힘껏 잡아당기자 생선의 주둥아리가 드러났다. 아저씨가 타이밍좋게 그물망을 집어들어 거들었다. 올라올수록 수면에 닿아 물거품이 크게 일었다. 펄떡이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호들갑을 떠는 사장의 목소리가 일순 묻힐정도였다. 박스에 담자마자 세차게 튀어오르는 물방울을 맞으며 사장이 줄자를 들고 달려들었다. 선생, 선생도 이것좀 봐! 58cm나 되는 이 생선은 감성돔이랬다. 충남은 서해권이라 몰밭으로 배타고 나가야 어렵사리 잡힐까 말까인데 오늘은 어지간히도 조황이 좋다며 싱글벙글이다. 좋은 상황이란건 확실하다. 사장은 호쾌하게 웃더니 아저씨에게 은혜의 양동이를 가져오라 시켜 광어 두 마리를 넣어주었다. 세상에, 사장님. 

 

 "이렇게 줘도 돼요?" 

 "아, 그럼! 내가 우리 선생 덕을 얼마나 봤는데!"

 

 그럼 감사히 받고 잘 먹을게요. 연갈색 눈동자가 예쁘게 반달로 접히며 웃어보였고, 아저씨는 요즘 얼굴이 펴서 보기 좋아보인다며 덧붙였다. 일 안하고 놀고먹으니까요, 요즘 잠도 아주 꿀잠자는거있죠. 너스레에 웃다보면 흥분이 한 김 식혀지고, 낚시 3인 파티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부둣가는 다시금 잔잔해져갔다. 멀리서 파도소리가 아스라히 들려오고 바다내음이 만연했다. 그 동안 릴을 바꿔 끼운 아저씨가 밑밥을 품질하고서 농어를 건져올렸지만 은혜의 낚시대는 한없이 평화로웠다. 일순 묵직한 느낌이 들어 레버를 서둘러 돌려봤더니 색이 예뻐 마음에 들었던 연분홍색 새우모양 루어만 먹혀 없어졌다. 아쉬운건 없었지만 재차 채비를 던지는 힘이 조금은 느슨해졌다. 슬슬 눈이 무거웠다. 하얀 린넨이 적당히 보호해주고 있는 등이 뜨끈뜨끈해지고 아저씨가 싸온 쥐포안주에 맥주 한캔을 쭉 들이켰더니 알맞은 취기까지 더해졌다. 이쯤하면 낚시대는 거치대에 맡겨졌다. 은혜는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고 모자를 앞으로 기울여 눌러썼다. 시야에 그늘이 지고 자세가 안락해지면 안팔짱을 꼈다. 샌들을 신은 맨 발 위로 시원함을 머금은 바람이 스친다. 그리고, 그리고... ... ...

 

 

 

 

 

* * *

 

 

 

 스르륵 눈을 떴을땐 목이 조금 말랐다. 사이가 차가워진 발가락을 꼼질거리며 밀려나있는 샌달을 바로 신으면, 눈 앞의 그늘이 꽤나 많이 드리워져 있었다. 찌뿌둥한 몸을 쭉 일으키자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매캐하게 담배냄새가 섞이던 참이다. 숨소리가 한 번 뒤 따르고서야 영원이 목소리를 냈다. 잘 잤어?

 

 "깨우려 했는데... 맞춰서 잘 일어났네."

 

 떨어트린 꽁초는 짓이겨 불씨를 꺼트리고, 영원은 팔걸이 앞에 붙어있는 홀드에서 페트병을 꺼내 건넸다. 무릎에는 은혜의 가운을 염색해서 만든 가방과 뜨개질감이 얹어져 있었다. 얇디 얇은 손가락이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게 이제는 부쩍 길었다. 그 너머로 서서히 노을이 지려했다. 사장과 아저씨는 의자를 빌려주고 집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은혜는 차가운 아이스티로 목을 축이자마자 양동이를 끌어왔다. 언니, 이거 봐요! 영원의 앞에서 만큼은 한껏 밝은 목소리가 드물지 않았다.

 

 

 

 그날 저녁은 영원이 매운탕을 끓였다. 돌담집 가득 기침이 나오지 않을 정도의 칼칼함이 돌자 은혜는 맥주를 두 병, 아니 세병을 사기위해 언덕길을 내려갔다.

 

 

 

 

 

Posted by 렌토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