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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5. 17. 05:02 from LOG

 

 

 

* 사탕수수님의 COC 시나리오 사룡장락 1부를 기반으로 작성된 플레이로그 소설화임을 기재합니다.

* 사룡장락 1부 시나리오 전체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접은글 열람시 주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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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이 두 똘마니와 함께 자리를 뜨자 연회장은 다시금 부산스러워졌다. 선임들이 저마다 점찍어둔 신입들을 하나 둘 데려가 자기가 뭐라도 되는 것 마냥 으스대며 젠체를 하는 가운데 적마와 영원에게는 만독이 다가왔다. 그는 연설내내 안현의 존재가 뿜어내는 위압감에 압도당하기라도 했는지 숨이 트인 지금에서야 낮게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이 딱히 각을 잡고 맞이하지 않아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은건 그만큼 긴장이 풀린건지 의외로 사람 좋은 구석이 있어 사적으로는 꽤나 유도리 있는건지 모를 일이었다. 뭐가 됐든 생긴게 존나게 아까운 놈이다. 한결같이 표정 감출 줄 모르고 뚱한 얼굴을 한 영원을 잠시 바라보더니 만독이 말했다.


"내가 너희들을 담당하게 될거다. 우선 규칙은 이 곳을 둘러보며 설명하지, 한번에 기억하긴 어렵겠지만 머리속에 잘 집어넣도록."

이어 적마를 향해 턱짓으로 영원을 가리켰다.

"이 녀석은 못 듣는다 했지? 자네가 말 좀 전해주게."
"예에, 예."

만독은 건성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적마에게 따라오라며 손짓을 하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가 몸을 돌리자 영원의 눈이 노골적으로 흉흉해졌다.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데 적마라고 아니겠냐만은 「눈깔 똑바로 떠, 승냥이 같은 년아.」하고 가볍게 타박하며 만독을 뒤따라갔다. 마지못해 졸졸 쫓아오던 영원이 흘겨보는 시선으로 앞장 선 만독을 가리키고 손을 움직였다.

「저 새끼 말 놓지 않았어요?」
「위아래 없는 씨벌럼한테 뭔 대접을 바라느냐.」

영원은 만독의 뒷통수를 노려보다 오른손으로 왼손의 새끼손가락을 잡고 뒤로 휙 젖혔다. 병신이라는 뜻이다. 누가 대가리에 피 덜 마르지 않았달까봐 영원은 종종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수어를 모르는듯 싶으면 그렇게 대놓고 욕을 해놓고 혼자 비웃었다. 소리 죽여 낄낄대는 꼴을 보며 언제 철이 들려나, 고개만 절레절레 젓는데 불현듯 만독이 뒤를 돌아봤다. 영원이 잽싸게 표정을 갈무리 하고 손을 숨기자 그는 의문스런 표정만 잠깐 지을 뿐 마저 복도를 지나갔다. "뭐라 했나?" "알겠답디다." 만독은 쉬이 수긍했다.

앞서가던 걸음을 서서히 늦추고 만독이 적마의 옆에 섰다. 이쪽으로 오려는 낌새가 보이자마자 영원이 반대편에 서는 바람에 졸지에 나이 지긋이 먹은 적마가 주인공처럼 가운데에 끼게 됐다. 만독이 가볍게 운을 띄우며 본격적으로 설명에 나섰다. 아무래도 영원을 의식하고 있는지 속도나 입모양에 신경을 써 말하는게 부쩍 느려졌다.

"규칙은 이러하다. 첫번째, 조직원들 사이의 분쟁은 금지되어있다. 눈에 닿지 않는 곳에서 가볍게 치고 박는것 정도야 어쩔 수 없다만 크게 싸우려면 선임의 입회 하에 정식으로 결투를 하도록."

적마는 만독이 말하는 중간부터 영원을 향해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기엔 통역을 해주는듯해도 영원은 제법 구화가 능한 편이었기에 편하게 제 불만이나 투덜거렸다. 입모양을 주시하던 영원도 움직임이 끝나자 함께 궁시렁댔다.

「내 살다살다 개싸움을 허락 맡고 하란건 처음 듣는다.」
「개새끼들이니까 그렇죠 뭐.」

그 대화를 알 턱이 없는 만독은 설명을 계속해갔다. 듣고 볼 가치도 느끼지 못해 온갖 불평을 토로하며 비아냥거리고, 비꼬고, 우스갯소리를 해대는 두 사람과 달리 의연하고 진지한 태도였다.

"두번째, 현무회의 일원이라는 증표가 있다면 이유를 막론하고 돕는다. 응당 형제이며 가족이니 말이다."

그의 시선이 흑갑패로 향하면서 존재감을 상기시키는게 마냥 못마땅했는지 영원이 흥, 콧김을 냈다.

「씨발 하여튼 가족 존나 좋아해, 저 새끼 진지한것 좀 봐요 아저씨.」
「그래... 말마따나 돕긴 도와야지, 조금 더 구천을 일찍 떠돌게 도와준다거나.」
「죽어서 쥐새끼 밥이 되도록 도와준다거나.」
「저놈의 혈육을 죽여도 나보고 자네는 응당 가족이니 용서한다고 말하나 보자.」

문득 만독과 눈이 마주친 영원이 퍼포먼스식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만독은 만족스러운듯 보일듯 말듯 아주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장애가 있음에도 현무회의 일원으로서 사명감을 갖고 성실하게 규칙을 배우려는 갸륵하기 그지없는 신입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실상은 욕이나 해대기에 급급했지만 말이다. 그가 알 턱이 없다.

영원은 원래 없는것들이 더하다며, 진짜 가족이 있어본적도 없으니 저 지랄을 하는거라 했다. 적마는 가족이라는 단어를 한때 진심으로 믿었던것을 떠올리곤 씁쓸함에 입을 다셨다. 어린시절의 적마는 자신이 천애고아든 설령 누군지 모를 씨로 진소여에게서 나왔든 그에게서 도무지 자신의 출처를 찾을 수 없어 진작 이 세상에 어머니라는 존재는 없다고 여겼다. 오히려 진소여를 가족이라 연관지으면 생물학적인 역겨움이 들었는데 그도 마찬가지였는지 서로를 데리고 사는 애와 길러주는 여자 이상으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런 그와의 생활에서는 느낄 수 없던것들이 현무회에는 있었다. 적마는 그게 진정한 가족인줄 알았다. 아둔하게도, 그들이 말하는 가족과 형제라는 울림에서 유대감을 느끼며 그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다짐하고 그리했던 지난 날은 돌이켜보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결코 가족이라 하지 않았지만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손을 놓지 않았던 진소여와 가족이라는 이름아래 자신을 배신한 선우 안현과 등을 돌린 현무회. 그 둘의 차이를 깨달은 대가는 후계자로 보낸 허송세월이면 충분하거늘 어깨죽지의 상처까지 얻게 된 건 꽤 손실이 크다. 혹시나 하지만 영원을 거둔것까지 포함된다면 아예 파산수준이다. 적마는 새삼스레 살아온 반백년 삶이 손해 투성이인것 같아 기분이 조금 언짢아졌는데 만독이 마지막 규칙이라 말한것에 더더욱 입안이 떫어졌다.


"마지막 세번째, 현무회는 서로를 배신하지 않는다."

역시, 선우안현 그 씨발놈은 오체분시감이다.

"만약 자신의 힘으로 선택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그 때는 현무회의 이름을 더럽히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거다. 개인보다 조직이 우선임을 혈관에, 심장에 새겨놓도록. 규칙은 이게 전부다."

영원은 물끄러미 적마를 바라보다 엄지와 중지를 맞대 소리를 냄과 동시에 엄지를 들어 적마를 불렀고, 그는 오른손의 검지를 관자놀이에 대어 대답했다. 영원이 고개를 비스듬히 치켜들고 오른손으로 제 가슴팍을 두어번 두드렸다. 「내가 있잖아요.」 농인치고 수어로 말할 때 비언어적 표현이 적어 어조를 파악하기 어려운 영원 치고는 꽤나 강한 표현이었다.

「나 데리고 다니는게 저 새끼들하고 놀았던거보다 더 재미있을거니까, 그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마요.」

적마는 선글라스 너머로 멀뚱히 영원을 바라봤다. 입이 좀 썼을 뿐인데 나이는 정직하다고 요실금마냥 은연중에 드러나버린건지, 아니면 그저 영원이기에 저에 대한걸 기민하게 알아차린 것 뿐인지. 늘상 내려올 생각을 않던 눈썹이 보기 드물게 팔자로 늘어지면서 적마는 조용히 웃었다. 소리내 웃을만큼 유쾌하진 못해도 때때로 맹랑하게 구는걸 보면 제법 우습고 귀엽다. 적마는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거칠게 되물었다.

「어쭈, 이 년 보게 누가? 네가? 자의식 과잉이다 그거?」
「말을 해도 참나...」

고운 반응일랑 바란 적 없지만 그래도 멋쩍긴한지 영원은 적마를 향해 샐쭉 눈을 흘기며 가운데 손가락을 들었다. 한결같은 태도로 연회장과 본관 건물의 구조에 대해 설명하던 만독이 마침 그 모습을 봤다. 설명을 요하듯 적마를 번갈아보자 우선을 되는대로 짓껄이고 봤다. 영원은 상황을 다 알아차리고서도 딴청을 피웠다.

"여..기 근처에 산이 참 멋있댑니다."

여기 오기까지 산 한번 본적 없는데도 만독은 어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산을 말하는 수어인가보지?"
"얘가 바닷가 출신이라 산을 많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요."
"흠, 욕같군."

애진작 굳은 짱구를 굴리려니 머리가 지끈지끈 했지만 만독은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역할에나 충실했다. 궁금하지도 않은 사족을 덧붙이길, 만독이 신입일 적 선임께서 세심하게 돌봐주셨다며 그저 받은만큼 베푸는것 뿐이라 하는데 그딴건 좆도 안 궁금하니 일이 있으면 주고 여튼간에 빨리 꺼져줬으면 싶었다. 얼추 설명을 마치고 연회장의 로비에 다다르게 되자 만독이 두 사람의 앞에 마주보고 서기 위해 움직이는 찰나에 적마는 영원의 머리를 냅다 쥐어박아주고 그 손을 등 뒤에 대었다. 영원은 당연히 대들려했지만 만독이 떡하니 버티고 있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적마를 따라 뒷짐을 지었다. 분이 안 풀리는지 실수인척 적마의 발을 꾹 밟았지만 코끼리 발에 개미 하나가 발 구르는 꼴이라 적마는 미동도 안했다. 그게 더 약이 올랐지만 별 수 있으랴, 영원은 시치미를 뚝 떼고 앞을 보라는 적마의 턱짓에 고개를 돌렸다.

"이쯤해서 너희들이 일처리를 어떻게 할지 솜씨도 구경할 겸, 간단한 일거리를 주겠다. 긴장은 하지 말고."

그가 두개의 쪽지를 내밀어 적마와 영원은 하나씩 나누어 받았다. 사람의 이름과 주소, 간단한 비고와 수금액이 적혀있었는데 눈 뜨고 못봐줄만큼 엄청난 악필이라 적마는 고개를 뒤로 멀리 빼냈고 영원은 코를 박을듯이 가까이에서 읽었다. 각각 적힌 이름은 왕력비와 범홍락이다. 전자의 수금액은 1,500위안이며 마약쟁이에 정서불안이니 자살하겠다며 소동을 피울 수 있으므로 주의하라 써있었다. 후자는 노름꾼에 아내와 어린 딸이 있는데도 집에 붙어있는 일이 드물어 자택에 없을 경우 찻집에 직접 찾아가 뫼셔야했다. 수금액도 3배가 넘는다. 자지 달고 태어났으면 값을 해야하거늘, 하물며 애비란 새끼가 이 지랄이니 마누라도 딸도 참 안됐다 싶었다. 으휴, 한심하단듯 한숨을 쉬는 영원의 손에 들린 쪽지를 가볍게 두드리고 적마가 말했다.

「여기 적혀있는 찻집, 내 단골이다. 차는 둘째치고 마작방으로 더 유명하지.」

카센터에서도 걸핏하면 벌어지는게 마작판이니 영원은 제법 흥미가 생기는듯 했다. 손짓이 가벼워졌다.

「이 두 놈들 잡아족치고 시간 남으면 거기서 마작 쳐도 돼요?」
「수금이다 수금, 놀러가는줄 아는게냐?」
「그치만... 실컷 때려눕히고 놀면 오늘 하루 스트레스 다 풀릴것 같아서요.」
「"이 년이 왜 이렇게 때리고 싶어해?"」

결국 손을 움직이는 동시에 어이없다는 목소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여즉 있던 만독이 부득불 "죽을 때 까지 패지는 말게." 하고 덧붙이자 적마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슬슬 귀찮음이 묻어나왔다.

"거 한가하기도 하시지... 안 바쁘십니까?"
"그래, 수금 꼭 해오도록."
"예,예... 아무렴요."

만독은 영원에게까지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돈 표시를 하고 단단히 알고 있으란느듯 검지 손가락으로 제 머리를 두어번 두드려 당부의 당부를 거치고서야 자리를 떠났다. 저 새끼가 옹알대며 손가락 빨고 다녔을 때 적마는 이미 후계자의 자리에 앉아 저보다 나이 많은 어른들을 휘두르며 경외와 추앙을 한몸에 받었는데 그 격차에 감사해야할지, 그의 똥멍청이같은 돌머리에 감사해야할지. 영원은 안쪽으로 멀어지는 만독의 뒷모습을 향해 주먹 쥔 두 손을 상하로 내밀어 손목을 맞대 멍청이라 욕을 해주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적마도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들며 걸음을 옮겼다.

「그럼 우리 어디부터가요?」
「너 맨날 하던거 있잖느냐.」

아무렴 좋아 손을 움직이고 담배 한개피를 꺼내 물자, 영원이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고 함께 꺼낸 1달러짜리 동전을 가볍게 던졌다. 한모금 뱉어낸 뿌연 담배연기가 가시자 영원의 손등 위에서 자유의 여신상이 반짝였다.

「첫번째부터 가자네요.」

두 사람은 남로로 향했다.

 

 

 

*




「근데 이 길들을 어떻게 다 기억하고 있어요?」
「나일 먹으면 어제그제 일보다 옛날일이 더 선명하거든.」
「와... 이제 할아버지 다 됐네.」

덕분에 헤메지 않고 빨리 왔다면 감사해도 모자를판에 쓸데없는 말이나 하는 영원의 손등을 찰싹 때려주고 적마는 주위를 크게 훑어봤다. 낡은 집합주택은 좁은 땅 위에 어떻게든 사람들을 욱여넣고 방세를 받으려 가파르고 높게 쌓여있었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공관 외에는 무용하다는 모습이 마치 닭장과도 같다. 458번지 건물 입구 앞에서 꾀죄죄한 아이들이 돌멩이를 모아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옆엔 늙은 노인이 누렇게 변색되고 때가 낀 의자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고 산더미 같은 빨래 바구니를 인 여자도 바쁘게 지나갔다. 하나같이 전부 이런 곳에 사는 이들 다웠다. 적마는 우선 아이들에게로 다가갔다. 영원이 있기 때문이었다.

적마의 뒤를 따라가던 영원은 예상대로 대뜸 아이들의 사이 한 가운데를 비집고 끼어들었다. 시선이 한번에 쏠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쭈그려앉아 바닥에 널브러진 돌멩이를 하나씩 던지고 받기를 반복했다. 능숙한 솜씨에 아이들을 떨떠름하게 낯을 가리다말고 금세 홀린듯 영원의 손이 움직이는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언니 잘한다아..."
"언니 언니, 언니 몇살이야?"

영원을 기준으로 오른쪽과 왼쪽이 내기를 하고 있었는지 왼쪽의 여자아이들이 종알거렸다. 낡긴해도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걸보면 쌍둥이나 나이차이가 얼마 나지않는 자매 같았다. 들리지 않는 영원은 자매를 본척도 않고 공기놀이에 열중하느라 순식간에 4단을 끝내고 꺾었다. 가지런히 모은 손가락 위로 가뿐히 모든 돌멩이들이 올라갔고 잡아채는것도 마찬가지였다. 영원의 바로 옆, 오른쪽의 제일 어린 아이가 탄성을 지르고는 영원의 옷자락을 세게 잡아당겼다.

"언니 이제 우리편 할거야!"
"안돼!! 한번 우리편은 쭉 우리편이라고!"
"너네 많이 했잖아!"

영원은 무게가 실린 쪽을 돌아보다가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기놀이를 계속했다. 아이들이 씨발 씨발 거리며 싸우기 시작하자 보다못한 적마가 영원이 돌멩이를 바닥에 흩어놓기 무섭게 전부 쓸어갔다. 바로 올려다보는 영원에게 씁, 하고 입을 다물자 입꼬리를 시무룩하게 늘어트리곤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들도 저마다 아쉬운 소리를 내며 적마를 바라봤는데 대개 애새끼들이라면 적마의 사특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보는 순간 울어버리거나 겁을 먹고 뒷걸음을 치곤했지만 여기 사는 아이들은 부모며 이웃이며 마약에 찌들어 길거리에 널브러지고, 추잡스러운 삶이 무엇인지 일찌감치 깨달은 덕분인지 둘 정도가 호기심 어린 눈을 하곤 슬금슬금 적마에게로 다가왔다. 얼굴이 까무잡잡한 남자아이와 자매 중 단발머리를 한 아이였다.

"아저씨 뭐에요?"
"우리 알아요? 아님 저 누나 아빠에요?"

특유의 성별구분없이 높은 목소리가 영 익숙치 않아 귀가 거슬린다. 적마는 괜히 간지러워진 귀를 후벼파고 영원에게로 빼앗은 돌멩이를 던져주며 대답했다.

"됐고, 아저씨 묻는 말에 대답 잘해주는 쪽으로 저 누나가 낄거다."

요령좋게 낚아챈 영원은 남아있는 아이들과 함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아예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적마에게로 온 아이들은 이제 영원이나 공기놀이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지 행여나 옆의 아이에게 질세라 서로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빽 소리쳤다. 새되고 얇은 목소리가 서툴게 긁혔다.

"그래요! 뭔데요?!"
"말만해요 아저씨! 나 아는거 완전 많다요?!"

적마는 흥분하는 아이들이 영 익숙치 않아 주춤 물러서며 손바닥을 보였다. 흡사 개를 진정시킬때의 제스쳐와 같았지만 그래서인지 효과가 있었다.

"왕력비라고 아느냐?"
"당근알죠, 옆집 사는 아저씨!"

에라이 씨발, 효과가 있단건 취소다. 남자아이가 튀어나오듯 아는체를 하자 밀린 아이가 샐쭉이 그 애를 노려보더니 제가 더 세게 밀쳐내며 투덜거렸다. "나도 알거든? 왕씨 아저씨 너만 아냐?" "너 그렇다고 왜 밀치는데!" "니가 먼저 밀쳤잖아!" 여기서 한마디만 더 떽떽 거렸다간 둘 다 대갈빡을 한대씩 쥐어박아주려 했는데 아이들은 기가 막히게 사그라들어 적마가 좀 더 물어봐주기를 기다렸다. 영원은 제 쪽에 남은 아이들에게 돌멩이로 저글링을 해주고 마술도 보여줬다. 그 쪽 아이들은 투닥대는것 없이 순하고 얌전하게 박수만 쳤다.

"그 왕씨 아저씨 말이다, 최근들어 이상한 행동 한건 없고?"
"그 아저씨는 늘 이상해요!"
"늘 이상해?"

이번엔 여자아이다. 적마의 반문에 머리가 헝클어지도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엄마가, 그 아저씨 약한다고 놀지 말..."
"약쟁이라 그래요 약쟁이, 정신병자 새끼!"

맛있는 부분을 제가 차지하고 싶은지 남자아이가 덥석 여자아이의 입을 틀어막고 선수를 쳤다. 어른들이나 하는 욕을 입에 올릴 줄 안다고 으스대는 것이다. "그래, 왕씨 아저씨는 지금 어디있지?" "밖에 나가는거 못 봤으니까 집에 있을걸요?" "알았다." 적마는 손에 힘을 잔뜩 빼고 히죽대는 남자아이의 머리만 한대 쥐어박아준 뒤 영원에게로 갔다. 뒤에서 깔깔대며 비웃는 소리가, 씨근거리다 뭐가 웃기냐며 괜히 화풀이를 하는 목소리가 정신없이 뒤섞였다. 역시 애새끼들이란 사람 기를 쪽 빨아먹고 빼놓는 요괴나 다름없다. 자매 중 안경을 쓴 아이가 캬라멜을 우물거리며 적마에게 자랑했다.

"할아버지, 나 언니가 캬라멜 줬어요."

적마는 올해 쉰둘이다. 할아버지 소리를 못 들은 나이는 아니다만 애석하게도 아직 아빠 소리 한번 들어본적 없어서인지 훅, 하고 가슴 한귀퉁이가 저릿했다. 적마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발로 툭툭 영원을 건들이고 말했다.

"쟤 편은 해주지 마라."
「편이요? 그걸 왜 해줘요?」

영원은 주머니에서 다 찌그러진 캬라멜을 전부 꺼내 제일 어린 아이에게 쥐어주고 저쪽으로 가란듯 손짓을 했다. 아이들은 천진하게 웃으며 저들끼리 모여들었고 뒤에서 어느새 주먹다짐을 하고 있는 다른 아이들을 부르며 다른곳으로 향했다. 금방 따라가는 여자아이는 머리가 좀 헝클어진 정도였는데 남자아이는 뺨이 손톱에 긁혀 퉁퉁 부어있었다. 그 자리에 서서 친구들을 노려보다 "너네랑 안 놀아, 썅년들아!" 하고 발을 구르며 반대쪽으로 사라졌고 그제서야 골목이 조용해졌다. 노인은 여태껏 그 아수라장에서 미동도 없이 신문을 읽고 담배를 폈다.

「왕력비 지금 집에 있는 모양이다.」
「그 새끼 자살하겠다며 소동 피울 수 있다했죠? 약을 먹여서 헤롱헤롱할때 돈 뜯어가는건 어때요?」

앞서 계단을 오르다 뒤를 돌아 말하는 영원을 올려다보던 적마가 중얼거렸다.

"비정한 계집애..."
"어-혀?"

그새 그걸 또 봤다. 도끼눈을 뜨길래 적마는 딴청을 피우며 얼른 올라가기나 하라고 재촉을 했다. 왕력비의 집은 3층 복도 끝에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갈 수록 집에서 내놓은 쓰레기며 물건들이 잔뜩 쌓여 발 디딜틈도 없는걸 겨우 헤집어 갔더니 꼴이 말이 아니다. 문패는 다 낡아서 숫자가 지워져있었고 온갖 찌라시들이 붙였다 떼어지기를 반복하면서 덕지덕지 남은 접착제가 지저분하다못해 더럽고 불결한 수준이다. 우편함에는 과태료 고지서가 엉망진창으로 꽂혀 있었고 갈라진 벽을 타고 이름모를 벌레가 수많은 다리를 움직여 재빠르게 몸을 숨겼다. 영원이 거리낌없이 우편함에 손을 넣어 열쇠를 찾아냈다.

「설마 그게 집열쇠는 아닐테고...」
「혹시모르니까 한번 해보죠 뭐.」

영원이 열쇠를 꽂아 돌리자 맥빠지게 문이 열리고 좁은 쪽방이 나타났다. 숨이 턱 막히는 퀴퀴한 곰팡내가 가득했다. 영원에게는 남자 혼자있는 공간 특유의 홀아비 냄새까지 느껴져 옷소매로 코를 틀어막았다. 사장님 방에 청소하러 들어갈때면 가끔 나는 냄새긴 하지만 왕력비는 당연히 돌봐주다못해 구박할사람도 없어 그 정도가 심했다. 집 안은 어줍잖게 판자를 모아 만든 낡은 탁자에 몸도 다 못누일만한 작은 매트리스가 전부였다. 다른 생활용품들은 적당히 바닥을 굴러다니거나 아무렇게나 쑤셔박히거나 벽에 빼곡하게 걸어둔 싸구려 스테인리스 네트망에 걸려 곰팡이의 생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치의 공간도 용납하지 않고 번지고 퍼지고 쌓였다. 그 위에 군림하고 있는 세균 덩어리가 부스스 눈을 뜨곤 두 사람의 모습에 놀란듯 허우적댔다. 약을 하고 잠들었는지 팔목에 묶고있는 토니켓이 덜렁거렸다.

"괴, 괴, 괴물...!!"
"그래, 사람 잡으러 온 괴물이다 새끼야."

마악 자다 깬 상태라해도 비정상적으로 눈에 촛점이 맞지 않고 혀가 굳어 발음이 몹시도 어눌했다. 가래인지 모를 것으로 목도 꽉 막혔다. 적마가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가자 왕력비는 패닉에 빠져 흐느적거리는 팔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약쟁이를 상대하는건 적임자에게 맡기고 영원은 옷걸이 하나를 집어들어 탁자를 헤집었다. 바닥만 남은 술병과 볶음밥 찌꺼기가 말라붙은 빈 그릇, 흰가루가 샌 약봉투 가운데 그나마 잡지는 깨끗한걸 보아 자주 읽는듯 했다. 헐벗은 여자가 빨간 밧줄로 사지가 결박되어 회초리 자국이 난 엉덩이를 내밀고있는 성인 잡지는 내버려두고 가장 두꺼운 잡지를 집어들었다. 오컬트 잡지다. 홍콩에도 네시가 있다느니 UFO를 촬영하기 위한 장비로는 무엇이 필요하다느니 별 쓸데 없는 기사 중에 눈에 띄는게 하나 있었다.

신의 강림, 예언, 멸망의 날.

그러한 표제를 두고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 가운데 여기저기 푸른 사인펜으로 낙서가 되어있었다. 깊은 바다, 거대한 괴물 앞에 서 있는 인간, 폭발하는 무언가, 터져나오는 잔해, 한면을 빼곡하게 덮은 수많은 개구리, 그리고 기묘한 문양들... 무슨 의도로 그려놓은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다음장을 넘기자 사이에 끼워뒀던 영수증 뭉치가 우수수 떨어졌다. 영원은 더 이상 용건없는 잡지를 대충 내던지고 영수증을 주워들었다. 가게 이름 아래 품목과 금액, 그리고 날짜가 적혀있었는데 내용을 보니 약을 천위안 어치 선불로 주문을 해놓고 아직 받지 않았는지 서명란이 비어있었다.

"이 씨발, 지금 장난쳐?"

그 사이 적마는 기어코 왕력비를 걷어차고야 말았다. 도통 말을 들어처먹질 않아 구둣발로 머리를 밟아줬더니 오히려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상기된 얼굴을 무릎께에 부비적거리는것이다. 발정난 개새끼가 할 법한 행동에 소름이 끼쳐 적마는 왕력비가 나가 떨어지고서도 다리를 몇번이나 털어냈다. 벽에 뒷통수를 박은 왕력비가 코피를 주륵 흘리며 나자빠진 몸을 일으켰다. 영문 모를 눈에 그제서야 빛이 돌아 적마는 한숨을 쉬며 그의 앞에 쭈그려 앉아 손을 내밀었다.

"자, 왕력비 씨, 수금액 천오백, 어서 주시게."

새삼 이 상황에 너무 자연스럽게 굴고 있나 싶어져 적마는 말이라도 최대한 차분하고 공손하게 꾸며내봤다. 그래봤자 굳은살 투성이의 두터운 손과 떡벌어진 어깨, 선글라스 너머 흉악하기 이루 말할데 없는 얼굴은 그대로라 왕력비는 오히려 지레 겁을 먹고 허둥지둥 무릎을 꿇고 앉아 매트리스 머리 맡에 놓여진 선반을 뒤지기 시작했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물건들을 파헤치다 남은 약기운인지 공포 때문인지 모를 사색으로 적마를 돌아봤다.

"도, 돈이 없으면 약을 모... 못 사, 못사서요... 하, 한번만 봐주시면 안될까요, 한번만..."
"이봐, 내 입장 좀 생각해보게. 나도 가오가 있는데 고작 천오백갖고 자네에게 이러고 있으니 얼마나 쪽팔리겠나. 그러니 빠르게 끝내자고. 응?"

잘근잘근 짓이기는 종용에 왕력비는 재차 무언갈 찾는듯 하더니 제 머리를 쥐어 뜯기 시작했다. "금방 갚을게요, 금방 갚을게요 제발!" 하며 우는 소리를 내는 속셈이 뻔해 적마는 주변에 널브러진 책상달력을 집어들어 그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한대, 두대, 세대, 모서리가 관자놀이를 긁어 또 다시 피를 보고서야 왕력비는 주머니에서 종이뭉치를 꺼내 까뒤집기 시작했다. 흘러내린 피가 식은땀에 섞여 수그린 옆얼굴을 타고 뚝뚝 떨어져내렸다. 손은 여전히 떨렸고, 그런 손으로 공손하게 떠받친 돈은 딱봐도 전부가 아니었다.

"지, 지금..은 이거.. 이거, 이것..만이라도..."

왕력비는 흐르는 침을 삼키며 마저 빌었다.

"제,제발,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선생님, 뭇,무서운것이 있어요, 약을 머,먹지 않으면 계속 보,보보,보여,보여서... ... 괴, 괴물... 위대한, 그분이... ..."

조직 생활을 하는 자들은 3가지 부류의 작자들과는 대화를 하지 않는데 첫번째는 성별분물 맨정신에도 눈빛이 맛이 간것들이고 두번째는 사이비요 세번째는 약쟁이다. 이미 두개나 해당되는데 인간 대하듯 말로 타일러 해결하려해봤자 제 손해였다. "이 사이비 새끼가 감히 사람을 호구잡으려 들어..." 적마는 제 이마를 문지르다 그대로 머리카락을 헝클듯이 긁었다. 왕력비는 점점 발작하듯이 떨어대더니 느닷없이 한손으로 제 귓가를 때려댔다.

"야-르 리에후, 야-르 리에후..."
"뭐?"
"크툴루틀 프타근!! 크툴루틀 프타근!! 이 씨발, 개병신새끼가 씨발..!!"

적마는 결국 그의 머리채를 단단히 잡아 매트리스 바로 아랫바닥에 내리꽂아버린 뒤 내밀고있던 돈이며 꽁쳐둔 종이뭉치까지 모조리 빼앗아갔다. 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처박힌 그는 까무룩 의식을 잃고 축 늘어졌다. 적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침을 뱉고 종이 뭉치를 검지와 중지사이에 꺾어잡은 뒤 빠르게 수를 헤아렸다. 꺼낸 돈은 184위안이고 숨긴걸 합쳐보면 대략 500위안은 됐다. 따로 고무줄로 묶어놓은 종잇조각은 펼쳐보니 푸른 사인펜으로 무언가 그려져있었다. 뭔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보는데 마침 영원이 다가와 고개를 쑥 내밀었다. 그러고는 아까 뒤적거리던 쪽으로 돌아가 오컬트 잡지를 들고왔다. 예의 낙서가 있던 페이지를 펼쳐 보여주며 가리키는것이다.

「이거랑 비슷한거 아니에요?」

나란히 두면 꽤나 닮은듯했다. 적마는 돈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대충 구겨 아무렇게나 던지고 손을 털었다.

"기분만 나빠졌다, 가자."

몸을 돌리는 적마의 뒤로 굴러 떨어지는 종이뭉치를 바라보던 영원은 인상을 쓰곤 잡지에서 문양이 그려져있는 부분을 찢어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내던진 잡지를 등허리에 맞은 왕력비가 번쩍 정신을 차리곤 두사람에게로 엉금엉금 기어가며 손을 뻗었다.

"자, 잠시.. 잠시만요... 이대로 가면 저는 정말 죽어버릴 거에요!!"

인기척에 걸음을 멈춘 영원은 어쩌라는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벽을 두드려 이미 문 앞으로 나가 담배 한대를 피우고 있는 적마를 부르고 손을 움직였다.

「이새끼가 떼 쓰는데요?」
「귀찮게 굴지 말고 꺼지라 전해라.」

영원은 왕력비를 냅다 걷어차주고 나왔다.

 

 


해는 여전히 중천에 떠 있었다. 시궁창 같은 쪽방에서 나와보니 늘상 미미한 소금기가 느껴지던 학라의 공기가 그렇게 상쾌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집합 주택 근처에 있는 상가로 향했다. 상가라 해봤자 불법 노점상들이 쥐떼처럼 모여들어 제대로 된 간판은 커녕 햇빛도 잘 들지 않는 모퉁이에 있다. 영원이 찾은 영수증을 내놓은 가게는 이 근방 딱 하나밖에 없는 약방이라 그나마 형태를 갖춘 곳으로 가까이 가면 어딘가 들큼하고 찝찔한 냄새가 풍겨왔다. 차양 아래에 세로로 파이프를 덧대어 약재를 노끈으로 매달아놨고 그 아래 벽에 늘어놓은 바구니에는 나무 뿌리며 말린 열매따위가 담겨 있었다. 영원이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적마는 쯧쯧, 혀를 찼다.

"인간이면 모름지기 빛 아래서 살아야지, 너무 어둡게사니까 안현이 새끼처럼 음침해지는거 아니냐."

적마는 슬레이트 판넬로 되어있는 문을 두드리며 목소리를 높혔다.

"거 주인장 안 계신가?"

대답이 없다. 다만 미약하게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번들거리는 누런 안광 한쌍이 그 곳에 있었다. 마치 죽은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미라처럼 의자 위에 웅크려 앉은 채 적마를 빤히 바라보는데 좁은 미간하며 사방이 트여있는 커다란 눈깔은 눈두덩이가 툭 튀어나와 꼭 물고기 같은 생김새였다. 그가 길고 가느다란 입술을 열자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다행히 물고기말이 아닌 사람말을 했다.

"약재를 사러오셨습니까?"
"아니, 환불을 하러 왔네."

가게를 구경하고 있는 영원은 그리 놀게 내버려두고 적마는 그에게 다가갔다. 앞에 놓인 책상 위에 이런저런 물건을 쌓아 공간을 만들고 매대 겸 계산대로 쓰고 있었다. 끓는 소리는 그의 뒤에 있는 제조실에서 나고 있었는데 무슨 약재인지 그 냄새가 몹시도 고약했다. 물론 적마는 콧잔등이나 한번 씰룩이고 말았다. 제 아무리 구리다 한들 시체 썩는 냄새보단 덜했기 때문이다.

"현무회에서 왔소. 우리 채무자가 빚은 안 갚고 여기서 약을 산 모양이더군."
"아아, 그럼 채무자가 누굽니까?"
"왕륜비라고 하는 놈일세."
"왕륜비? 내 력비라는 사람은 압니다만."
"륜비가 아닌가? 그럼 령비?"
"력비요 력비, 왕력비."
"거, 역비던 천비던 영수증도 있으니 환불이나 해주시게."

그는 영수증을 확인하곤 눈을 데구르르 굴리더니 민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거 곤란하네... 이 양반 약은 이미 만들어 두었는데. 현무회라고 했죠? 어디 흑갑패좀 봅시다."

적마는 자켓 밑단을 옆으로 젖혀 흑갑패를 보여주었다. 영원은 천장에 달려있는 나물같은 건초를 내려보려는듯 까치발을 들고 팔을 뻗거나 제자리에서 폴짝대며 별 지랄을 다 하고있던 참이라 허리춤에 매단 흑갑패도 따라 촐싹거렸다. 우중충한 불빛 아래에서도 흑갑패는 매끄럽게 빛이 난다. 남자는 숨소리도 내지않고 책상 아래의 서랍장에서 종이를 꺼내 무언가를 적으며 말했다.

"현무회니 선금은 다시 내주는 수 밖에, 편지 한장을 써 드릴테니 랍하에게 가서 보여주십시오."
"미안하게 됐소, 약은 다른 사람에게 잘 팔아넘겨보시게."
"신경쓰지 마세요. 그나저나 저 아가씨는 굶겨놓습니까? 여기 것을 막 주워먹었다간 큰일납니다."

어느새 계산대로 온 영원의 손에 입구가 아무렇게나 튿어진 종이봉투가 들려있었다. 적마가 가늘게 뜬 눈으로 영원을 훑어보자 히죽 웃더니 계산이나 하라며 봉투를 팔안쪽에 끼고 왼손바닥위에 오른손 끝을 좌우로 스쳐냈다. 적마는 남자가 내미는 편지와 선금을 건네받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애새끼를 데리고 다니는건지 도둑년을 데리고 다니는건지, 차라리 돼지새끼 한마리 기르는게 더 가성비가 좋나 싶다. 영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봉투안에 있던걸 입에 털어놓더니 바로 으웩, 하고 뱉어내며 기침을 해댔다. 적마가 매섭게 돌아보자 남자가 말했다. "그건 그냥 고삼잎 말린거에요." "...저 망할년이 아주 지랄 발광 네굽질을 하네." 적마는 이젠 반쯤 체념한듯 지갑을 꺼냈다.

"거 큰일 안 나는 맛있는건 없나? 달달한걸로."
"사람에게 맛있고 단 것이라면... 말린 과일이 있죠."
"한팩 주시게. 고삼까지해서 얼만가?"
"40위안만 주세요."

적마가 돈을 내놓자 남자는 느릿느릿 일어나 가게 구석으로 갔다. 벽에 기대어 세워둔 묵직한 자루를 젖히고 손을 쑥 집어넣어 플라스틱 주걱 가득 알록달록한 건과일을 수북히 퍼올린 뒤, 바로 옆에있는 기둥에 걸어둔 셀로판 봉투를 한장 떼어내 담아내자 겉에 묻은 희고 보드라운 설탕분이 사르르 떨어졌다. 누가 쥐어잡은 것 처럼 얼굴을 구기고 있는 영원의 어깨를 툭 치고 남자를 가리키자, 영원은 단번에 화색을 띄고 그에게 다가가 공손히 두 손을 내밀었다. 한바퀴 돌려 능숙하게 매듭을 지어 건네주는 남자의 손가락 사이로 얇게 늘어진 피부가 언뜻 보였다. 벗겨진 피부 껍질이라기엔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희미하게나마 푸르고 붉은 혈관이 비쳤다. 이를테면 물갈퀴처럼.

영원이 봉투를 받으며 내려다보자 남자의 손은 재빨리 소매 안쪽의 깊은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다시 느릿느릿 자리로 돌아가며 "고랍하는 현무회 별관으로 가면 있을거에요." 하고 일러주었다. 꾸벅 목례로 대답하고 가게를 나가려는데 영원이 적마를 덥석 붙잡았다.

「뭐냐?」
「저 주인장한테 요즘 개구리가 많이 생기는 이유가 뭔지 물어보면 안돼요?」
「개구리 천적이 없어져서 그렇겠지. 요즘 그런거 있잖느냐, 기후위기 어쩌고 저쩌고...」

그럼에도 영 미심쩍은 얼굴이 도통 나아지질 않길래 적마는 먼저 나가있으라는듯 어깨 너머로 문을 가리키고 다시 계산대로 향했다. 영원은 건과일을 한웅큼 입안에 집어넣으며 자리를 비켜줬다.

"저, 말 좀 묻겠네. 우리같은 무지랭이들보단 그쪽 양반이 더 학식이 있을테니."

운을 띄우자 남자가 적마를 바라봤다. 처음 가게에 들어왔을때와 움직임이 감쪽같이 똑같다.

"뭔가요?"
"요즘들어 학라에 개구리가 많아졌다고 하던데 왜 그런지 아시오?"
"원래 우리 주변이 강과 가깝잖습니까. 원래 살던것들이 수를 불려 더 많아진 모양이지요."

다같이 살아가는 친구들이라며 남자는 무던히 말했다. 별 이유는 없는듯해 적당히 이야기를 갈무리하고 나가던차에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두꺼운 점퍼안에 손을 쑤셔넣은, 이런 가게며 이런 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원미상의 음침한 손님이었다. 지나쳐가는 차에 음울한 비린내가 스쳐지나갔다. 약방의 것과 비슷했다. 고작 이런 가게에서 짓는 주제에 얼마나 잘 드는 약이 있는지 몰라도 아주 절여진 모양이다. 적마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영원에게서 건과일 봉투를 덥석 집어가며 말했다.

"그냥 수가 불려진것 같다는데."

그래도 염치는 있는지 영원은 순순히 봉투를 내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묻은 설탕분을 탁탁 털어낸 뒤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고 묻는다.

「그럼 이제 집? 아니면 찻집? 어디가 더 가까워요?」

적마는 잠시 거리를 가늠해보며 건과일을 봉투채 입안에 와르르 털어넣었다. 두 볼이 욕심많은 햄스터처럼 부풀어 터지기 일보직전이 되자 기겁하며 봉투를 가져가려는 영원을 가소롭단듯 한손으로 막아내고 두어번을 탈탈 수거하고서야 돌려줬다. "이거 너무 달아서 목이 타는구만." 혼잣말을 하며 입가를 슥 훔치고 적마는 영원을 향해 모로 세운 양손의 손 끝을 맞댄 뒤 방향을 가리키고 성큼성큼 앞장서 갔다. 영원은 허망하게 봉투를 열어봤다. 설탕분만 풀풀 날리고 있었다.

 

 

 

*




서로의 주택가는 남로보다는 한결 형편이 나았다. 집들이 조금 낡은 감은 있어도 층고가 낮고 가리는게 없어 사이사이로 볕도 잘 들었고, 전반적으로 사람의 손길을 거쳐 관리를 받은 태가 났다. 골목 한켠에 자물쇠를 건 오토바이나 자동차 따위가 주차되어 있었고 아스팔트며 전봇대 또한 깨지거나 기울어진 것 없이 제 기능을 했다. 찌라시가 종종 붙어있어도 담벼락은 깨끗했고 그 아래 손질되어 물을 머금은 화분따위도 이따금씩 내놓아져있었다. 그렇다보니 범홍락의 집은 눈에 띌 수 밖에 없었는데 야트막한 남색 기와 지붕에 흰 벽, 색이 연한 나무 살을 교차해 짠 장식이 정교하게 올라가있어 제법 집값이 나가보이는것 이전에 도통 폐허같았기 때문이다. 남들 다 청소하는 동안 이 집은 대체 뭘 했는지 주변이 치우지 않은 쓰레기로 가득했다. 지나가던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집 앞에 다 마신 음료수 병을 내려놓고 갈길을 갔다. 말라죽은 화초와 빈상자가 아무렇게나 쌓여있고 까마귀나 길고양이가 헤집어 놓은 음식물 쓰레기가 널브러졌는데도 집 안의 불은 켜져있다. 영원은 채무자의 비고 사항을 떠올리며 인상을 썼다.

「애가 있는데 집을 이렇게 해놔요?」
「한때 잘 살았던 놈이 도박하느라 가산을 탕진하고... 뭐, 뻔하잖느냐. 아직 길에 나앉지 않은게 천운인 놈이겠지.」

영원은 탐탁찮은 기색으로 입을 삐죽이다 대문을 두드렸다. 머지않아 안에서 현관문이 열리고 누군가 걸어나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보폭이 짧고 무게가 가벼운, 전형적인 어린아이의 것으로 아니나 다를까 무척 앳된 목소리가 물었다.

"누구세요?"

적마가 영원을 보며 살짝 구부린 양손을 얼굴 옆에서 흔들고 마저 손을 움직였다.

「애가 누구냐는데? 느이 애비가 빌린 오천 뜯으러 왔다 할까?」

영원이 고개를 얼른 저었다. 문 뒤에서 다시금 목소리가 누구냐며 물었다.

「아빠친군데 아빠 어디갔냐고 물어봐요, 일단은!」
"어어, 그래... 나 범홍락이 친군데, 네가 홍락이 딸인가보구나. 아빠는 어디갔느냐?"

적마의 최대한 자상스럽게 꾸며낸 목소리가 통한건지 조금 머뭇거리는 감이 있어도 이내 조심스레 문이 열렸다. 틈 사이로 여자아이가 몸을 반쯤 내밀었다. 적어도 초등학생은 되어보였는데 영원의 허리춤을 간신히 넘을 정도로 작고 말랐다. 하나로 낮게 묶은 머리는 부스스하게 잔머리가 빠져나왔고 언제 갈아입혔는지 옷도 많이 낡고 더러웠다. 아이는 겁에 질려 주눅 든 얼굴로 두 사람을 올려다보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채 더듬더듬 말했다. 옷깃 틈으로 푸르게 색이 빠져나가는 멍이 보였다.

"지, 지금 집에 어른 안 계세요... 엄마두, 아빠두, 나가셨고... 린화 한테는 돈이 없어요. 죄송... 죄송합니다, 한번만 용서 해주세요..."

린화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푹 수그렸다. 일련의 대응이 아이에겐 너무나도 당연하고, 또 익숙해보여서 그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지 자식이 어른에게 한번만 용서해달라 말하고 고개 숙여 빌도록 가르치는 부모라면 사정이 어찌됐든 그냥 뒤지는게 낫다. 적마는 차마 소리 낼 수 없는 욕짓거리를 입모양으로만 내뱉다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영원은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몸을 돌려 골목 바깥으로 나갔다. 적마가 물었다.

"... 엄마는 어디갔고?"
"엄마, 엄마 돈벌러요..."
"언제 나갔는데?"
"아침 일찍요..."
"하... ..."

그래도 머릴 묶어주고 옷이나마 입혀놓은게 어미라도 키우는 것 같긴 한데 꼴을 보면 그게 변변치는 않아 보였다. 이대로 빈손으로 가긴 영 찝찝하고, 그렇다고 애새끼 돌보는건 말도 안 하고 어디서 또 칠렐레 팔렐레 한눈 팔고 있을 참새같은 년 하나 데리고 다니는걸로 족해 "이건 또 어딜갔어?" 하며 영원을 찾는데 빵 봉투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그걸 대뜸 린화에게 안겨주고 적마를 보며 손을 움직였다.

「얘 얼른 먹으라고 해주세요.」
「너는 애가 어딜 갈거면 말이라도 해라 좀.」

두 사람이 손을 움직이는걸 신기한듯 올려다보던 린화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다시금 움츠러들었다. 겁을 먹은건 둘째치고 우물쭈물하며 들고있는 빵봉투만 자꾸 만지작거렸다. 다른 애새끼들 같았으면 진작에 봉투에 든걸 꺼내거나 하다못해 내거냐고, 먹어도 되냐고 재촉할텐데 이 아이는 달콤한 냄새에 침이나 꿀꺽 삼키며 어른의 허락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적마가 손을 내저었다.

"이 언니가 너 먹으랜다."
"지,진짜요...?"
"먹으래도, 어서."

영원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자 린화는 그제서야 빵을 꺼내 허겁지겁 베어물었다. 욕심껏 벌린 입가 옆으로 샛노란 파인애플잼이 빠져나왔다. 조그만 입을 열심히 오물거리면서 잼을 닦아낸 손을 빨아먹고 입안에 든걸 다 삼키기도전에 또 한입 베어문다. 정신없이 빵을 해치우는 아이를 두고 적마와 영원은 시선을 나눴다. 뭐라 할 것도 없이 영원이 자연스럽게 아이를 뒤로 돌려 집안으로 떠밀어가자, 적마가 얼른 선수를 쳤다.

"빵 사줬으니까, 아버지 올 때 까지 잠깐만 기다리자꾸나. 괜찮지?"

영원이 재촉하듯 어깨를 두드리자 아이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문을 제대로 닫고 작은 마당을 지나 들어오기까지 더럽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집안은 특히나 가관이었다. 구조를 파악할 수 없을만큼 쓰레기가 산을 이뤄 아치형 입구 너머 간신히 보이는 부엌이란게 컵라면같은 인스턴트용기와 술병으로 엉망이 되어 들어가는것조차 꺼림칙했다. 그 사이를 헤집어가는 한걸음에 꾸물대던 날파리가 일어나고 또 한걸음에 모여있던 바퀴벌레가 흩어졌다. 방역복이라도 입어야할 판인데 아이는 아무렇지않게 그 안에서 반쯤 물이 든 페트병을 찾아내 입구를 손으로 대충 문질러 닦고 그대로 마셨다. 안에 든건 그럭저럭 깨끗해보이긴 했지만 여러모로 아연해진 두 사람을 두고 린화는 저 혼자 재잘대기 시작했다. 입가에는 여전히 빵가루가 묻어있었다.

"아빠는 오늘도 차 마시러 갔으니까 내일 오실거에요, 아빠가 또 돈을 들고가서 엄마가 화를 많이 내셨거든요. 저쪽은 주방, 저쪽은 화장실, 저쪽은 작은방, 그리고 저쪽이 린화가 사는 방인데 아빠 기다리려면 저 방에서 기다리면 돼요! 엄마 오기 전 까지만... 엣퉤퉤!"

입에 파리가 들어갔는지 린화는 말을 하다말고 퉤퉤 침을 뱉었다. 팔을 휘저으며 벌레를 내쫓던 영원도 얼굴을 잔뜩 구기며 혀를 날름 거렸고 요령 좋은 적마는 입을 꾹 다물고 아이가 말한 방문을 열었다. 시체에 파리가 얼마나 끓는데 이 정도 불결함이나 악취에 하나하나 반응했다간 횡경막이 남아나질 않을거다. 사는 방이라고 뭐 다르겠냐만은 적어도 생활감이란게 남아있었다. 먼지구덩이에서 얽히고 설킨 전선을 통해 구형 브라운관 티비가 시시각각 번쩍였다. 방 안엔 꼬질꼬질한 이불하며 배게, 옷가지, 생필품과 아직 뜯지 않은 인스턴트 제품들이 나뒹구는데 티비에서 나오고있는 이등신 돼지 새끼는 깨끗하고 아늑한 집에서 정돈 된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영원이 적마의 어깨를 가볍게 건들이고 손을 움직였다.

「마저 시선 끌게요.」

적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 옆에 놓인 서랍장으로 향했다. 영원은 교묘히 아이가 그를 돌아보지 못하게끔 뒤에 서서 티비 앞으로 갔다. 발로 대충 바닥을 밀어 자리를 만들고 앉아 아이를 제 무릎에 올려놓고 단단히 끌어안자 아이는 좋다고 영원의 품에 안겨 재잘재잘 돼지에 대한 설명을 했다. 적마만 그 이야기를 들으며 서랍을 열었다. 쭈글쭈글하게 주름이 져있는 낡고 해진 여성용 속옷 아래에 종이가 여러장 깔려있었다. 여태껏 그 쓰레기들을 헤집어 오면서 미간에 주름 한 번 진적 없던 적마의 얼굴이 온 힘을 다해 찌그러졌다. 저것만큼은 때려죽여도 만지고 싶지 않아 서랍을 통채로 빼내 들어있던걸 바닥에 전부 쏟아낸 뒤 종이들만 집어들었다. 범홍락이 온갖 곳에서 받아온 차용증과 마이너스 통장이다.

이 새끼는 장기밖에 답이 없다.

애가 있는데 느그 애비 개씹새끼라고는 할 수 없으니 적마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범홍락이 품고 있는 오장육부를 다 떼다 팔아도 갚지 못할만큼의 빚을 내니 마누라까지 여기저기서 돈을 빌렸다. 이런저런 각서도 여러장에 집은 진작에 담보로 걸려있고 마이너스 통장은 은행별로 만들어놓고 진작에 한도가 꽉 차 전부 휴지조각이나 다름 없었다. 애비가 어떻게 집안을 망쳐놨는지도 모르고 린화는 마냥 천진하게 웃으며 티비에서 나오는 돼지새끼의 대사를 그대로 따라했다. "나는 아빠를 사랑해!" 듣지 못하는 영원은 멀뚱히 화면만 바라보다 린화가 허리춤에 건 흑갑패를 만지작거리자 안고있던 팔을 풀고 그 손을 잡아 멈추게했다. 씁, 하고 하지말란듯 고개를 젓자 올려다보던 아이가 무어라 대답을 한다. 영원은 린화를 무릎 위에서 내려놓고 저와 마주보게끔 앉혀놓은 뒤 입을 열었다.

"ㅇ,아-시, 맛,말... 해주,래?"

어눌한 발음과 불규칙한 높낮이의 목소리에 아이는 뭐라는거냐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결국 흑갑패의 매듭을 풀어 들어보이며 다른 한손으로 가리키니 알겠다는 탄성을 내곤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거요, 그거 하고 있는 무서운 아저씨들 많이 봤거든요? 그런데 언니거는 린화가 본 것들중에 색이 제일 예뻐요."
"그염, 뎌, 아-허히 것도? 언,어이거처...럼. 그얘?"

적마는 한참 장롱을 살펴보고 있던 중이었다. 린화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영원은 아이의 두 손목을 양손으로 잡아당겨 제쪽을 돌아보게했고, 이번에도 얼떨결에 고개를 바로한 아이는 영원을 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머지않아 이번에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응! 저 아저씨것도 엄청 예뻐요!"

장롱에서도 별다른 소득이 없어 적마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병뚜껑 하나를 집어들어 영원에게로 가볍게 던졌다. 고개를 든 영원을 보며 마땅히 찾은 건 없단 뜻으로 모로 세운 오른손을 좌우로 휘젓자 영원이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할 얘기가 있단걸 눈치빠르게 알아챈 아이는 투정부리는것 없이 알아서 티비를 향해 엉덩이를 끌고 가까이 붙어앉았다. "얘야, 눈 나빠지니까 뒤로 가거라." 바로 몸을 뒤로 빼는게 까만 단발머리를 한 누구보다 말도 잘 들었다.

「서랍장이며 옷장에서 돈을 개뿔, 차용증에 마이너스 통장만 잔뜩 봤다. 학라에 있는 모든 대부업들의 VIP지 뭐냐.」
「애를 이렇게 내팽겨쳐놓는 새끼가 뭐 정상이겠어요.」
「옘병, 귀찮게시리 찻집까지 뫼시러가야겠군.」

영원이 아이를 눈짓했다.

「얘가 저희 흑갑패가 좀 다른 것 같대요.」

그 말에 적마는 흑갑패를 손에 쥐고 들여다봤다. 이리저리 둘러보고 창가 아래로가서 햇빛에 비춰도 봤지만 당장 보기만해선 그저 잘 다듬어진 흑갑패일 뿐이었다. 오히려 예전에 쓰던건 모서리 마감도 투박하고 손으로 쓸어보면 미세하게 우둘투둘한 느낌이 있었는데 이번에 달게 된 건 계집들이 쓰는 비취장식마냥 반질거리고 질도 더 좋았다. 이런 사소한데까지 죄다 입김을 불어넣은걸 보면 안현 이 새끼가 실권을 쥐고 얼마나 신이 났을지 눈에 선했다. 적마는 양 손의 엄지와 검지손가락을 위로 향하게 하여 동시에 맞대 똑같다며 대답하고 문으로 손짓을 했다. 영원도 따라 나가려하자 기척을 들은 린화가 급하게 영원의 바짓단을 잡아 멈춰 세웠다.

"언니 잠깐만요, 린화가 주고 싶은거 있어요!"

입모양을 읽지 못해 어리둥절해하는 영원에게 적마가 수어로 얘기해주는동안 아이가 얇은 책자 한권을 가지고 왔다. 온갖 음식점의 찌라시들을 철해놓은건데 표지에 제 이름을 적어놓고 페이지마다 글씨를 따라쓰거나 밑줄을 친 흔적으로 너덜너덜해진걸 린화는 이게 제 공부책이라며 사이에 깊숙히 숨겨놓은 종이 쪽지를 꺼내 영원에게 내밀었다. 여러번 서툴게 접고 접어 잔뜩 구겨져있었다.

"엄마가 착한 친구한테는 선물 줘도 된다고 그래서요! 이거, 진짜진짜 린화 보물인데 언닌 착한친구니까, 그래서 언니한테 주고싶어져서..."

수줍은지 말끝을 흐리던 린화는 제 손을 꼼지락 맞잡으며 연신 영원의 눈치를 살폈다. 아이의 진심어린 순수한 마음이 기꺼웠는지 천하의 비정한 계집애가 한껏 표정을 풀고 사르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모습을 적마는 가만히 바라봤다. 모든 여자들이 상냥하단건 천하의 개 쌉소리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영원은 여느 평범한 계집들과 다름 없어보였다.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되고, 총과 칼을 만질 필요도 없는. 보편적인 삶 말이다. 그 얼굴이 쪽지에 그려진걸 보자마자 원래대로 돌아왔다. 영원은 적마에게 쪽지를 건네주고 아이에게 물었다.

"우,누-가... 줘써? 저 그임.."
"몰라요. 언제부턴가 집에 있었는데..."

왜 그런가 했더니 여자아이가 보물이라며 소중히 간직하기엔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서투름의 문제를 떠나 무언가를 형상화 했다기엔 형체도 불분명하고 규칙도 없어 이를테면 기묘한 문양같았다. 왠지 낯설지 않아 곰곰히 생각해보니 왕력비의 집에서 보았던 그것과 비슷했다. 아이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개구리들이 도망가게하는 그림이라고 하던데요?" 하고 덧붙였다. 영원이 적마를 돌아봤다. 「약쟁이 집에 있던건데, 기억나죠?」 적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림을 다시 접어 영원에게로 돌려준 뒤 「이제 얼른 가자.」 하고 먼저 방을 나섰다. 영원은 못내 아쉬운듯 쉽게 발을 떼지 못하다 아이를 번쩍 안아들어 한바퀴 빙글 돌려주었다. 꺄르르 소리내 웃던 아이는 내려와서도 상기된 얼굴로 방문앞까지 쪼르르 마중을 나왔다.

"아저씨하구 언니 또 놀러와요! 나중엔 숨바꼭질해요!"

앞장 서 쓰레기를 헤쳐가던 적마가 걸음을 멈췄다. 주머니를 뒤져 나오는 지폐 몇장을 린화에게 주란 듯 뒤따라 나오던 영원에게 쥐어주자, 영원은 둥글넙적한 모택동의 얼굴 옆에 제 전화번호를 적어 주며 아이가 엄마 아빠한테 절대 주지 말라는 말을 알아들을 때 까지 단단히 일렀다.

 



집에서 바로 옆에있는 골목으로 나가 쭉 걸으면 바로 찻집이 있다. 얇은 통판에 茶라는 한자가 제대로 적혀있건만 알루미늄 현관문은 군데군데 실금이 가있고 격자무늬 유리창에 붙여놓은 시트지는 끝이 너덜너덜하게 울어나있었다. 샷시 틈으로 자욱한 담배연기가 피어올랐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작자들이라면 슬슬 집으로 퇴근할 시간인데도 찻집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좁은 간격으로 놓여져있는 테이블 사이로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종종대며 바쁘게 지나다녔다. 이 너구리 같은 곳은 참 한결같기 그지없다. 축적된 담배 쩐내가 섞인 공기가 돌자 찔끔 눈물을 짜내며 콜록대는 영원과 달리 태연하게 안을 둘러보던 적마의 눈에 누군가 들어왔다. 붉은 점퍼를 입은 남자가 주먹으로 판을 내리치며 목청을 높혔다.

"공사치고 있어 씨발, 야! 어디서 패를 빼려고 들어?"

바로 앞에 있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한마디씩 했다.

"또 홍락이네."
"홀딱 벗겨져서 쫓겨난지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또 마누라 돈 훔쳐왔겠지."
"기어이 술집까지 가게 만들어놓고 저렇게 정신을 못 차려서야."
"현무회에서도 끌어다 썼다지?"

저도 언제 가다가 짱돌맞고 죽어도 이상한 놈이 아니라지만 이렇게 존재자체가 씹스러운 후레새끼는 그러니까, 이 세상이 어찌나 넓으면 저보다 더한 놈도 있나 싶어 새삼스러워지는 것이다. 길게 엮였다간 여러모로 기분만 잡칠 것 같아 용건만 빠르게 끝내려 그쪽으로 가려는데 씨근대던 범홍락이 두 사람을 발견하곤 삿대질을 했다. 처음에는 정확히 적마를 가리켰으나 선글라스로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어도 풍기는 사특한 분위기에 어물쩡 옆에 있는 영원에게로 비껴갔다. 그걸 무마하듯 목소리가 컸다.

"야, 너! 이게 처음왔으면 가게 단골한테 인사부터해야지, 그게 예의인거 몰라?"

키는 영원과 엇비슷했지만 옷의 품이 큰걸봐서 체격은 별볼일 없는 듯 했다. 짧게 바짝 다듬은 머리 아래로 드러난 귀가 크고 얼굴이 길쭉해 꼭 원숭이같이 야비한 인상의 남자였다. 린화는 동글동글하고 예쁘장한 사과같았는데 여러모로 애비를 닮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다가오는 걸음이 휘적거리자 그 근처 사람들이 질린다는 얼굴로 저마다 의자를 당겨 길을 터줬다. 얼굴도 시뻘건게 이미 술이 잔뜩 꼴았다. "계집년이 어른들 무서운줄 모르고 잘도..." 뭐라 짓껄이던 말던 영원이 위협적으로 손을 치켜들자 바로 흠칫 쫄아들었다. 한대 치려던 그 손을 적마가 붙잡아 만류했다.

"여기서는 때리면 바로 쫓겨난다, 가게 룰이 그래."

입모양을 읽은 영원의 얼굴이 범홍락을 보자마자 살벌해졌지만 그는 적마가 저를 보호해줬다 여겼는지 주제에 한껏 기고만장해져 이죽댔다. 꼴에 과시를 좀 해보겠다고 목에 힘을 주고 좌우로 꺾었지만 의도했던것과 달리 딱히 소리가 나질 않자 급하게 손가락 마디를 눌러댔다. 그래봤자 영원은 듣지도 못했다.

"뭘 그렇게 야리냐, 꼽냐? 꼬우면 한판 하지그래? 이기면 이 오빠가 뭐든 해달라는대로 해줄테니까, 어?"

꼴같잖은 새끼가 따로 없다만 아직 수금이 남아있기도 했고, 적마 또한 나름 이 가게의 단골인지라 소란에 어찌할줄 모르고 주방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주인장을 봐서라도 일을 크게 키우고 싶지 않았다. 치기 어린 계집이 알겠냐만은 이게바로 점잖음이요 연륜이란 것이다. 범홍락이 주제파악도 못하고 실실 쪼개기 시작하자 소매를 걷고 성큼 달려들려는 영원을 팔로 막아내고 적마는 근처 빈자리의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영원에게도 앉으라 턱짓을 했고 범홍락에게도 말했다.

"자네, 우리가 현무회에서 온 건 알고있지? 순순히 돈 내놓을 생각은 없으시겠고."
"아 형씨 딸내미가 이기면 내놓을게, 이기면. 그나저나 형씨는 나이도 많아 보이는..."
"빡치게 하지 말고 한명 더 데려오기나 하게."

범홍락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낄낄대며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어이 곽 씨! 이리와봐!" 하며 사람을 불렀다.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비슷하게 골빈 남자가 어슬렁 어슬렁 다가오더니 마지못해 자리에 앉아있는 영원을 음흉하게 위아래로 훑어봤다. 웬 젊은 아가씨냐며 이름이 뭐냐, 몇살이냐, 마작은 칠 줄 아냐, 고개도 돌리지 않는 영원에게 껄떡대길래 적마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한대 내리치자 슬금 눈치를 보고 저들끼리 쑥덕댔다. "저 년 애비야?" "몰라 씨발." 거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면 주인장에겐 미안하지만 가뜩이나 꼴받는걸 간신히 참고있는 영원과 합세해 나란히 땅에 박아버리려했는데 알아서 직원을 불렀다. 체구가 자그마한 직원이 잽싸게 다가와 코팅이 벗겨지기 시작한 메뉴판을 내밀었다.

꼴에 찻집이라 이름도 생소한 차가 빼곡했다. 한장 뒤로 넘기면 술과 음료가, 그 다음장은 간식인지 안주인지 구분도 해놓지 않은 음식들이 줄줄이 적혀있었다. 어차피 먹을 목적으로 앉아있는것도 아니라 다들 이과두주나 피단처럼 값싼 메뉴로만 주문을 했는데 영원은 고민없이 에그타르트를 가리켰다. 자체가 비싼 음식은 아니었지만 여기선 제일 비쌌다. 갯수를 묻는 직원의 메모장을 자기가 가져가더니 무어라 적어주었고, 이내 패가 담긴 케이스를 들고 돌아온 직원이 영원의 앞에 수북히 에그타르트를 쌓아놓고 갔다. 영원은 화풀이를 하듯 하나를 덥석 집어들어 신경질적으로 한입에 쑤셔넣었다. 적마는 이번만큼은 뺏어먹지 않기로 했다. 

"그럼 친부터 뽑자고."

네 사람중 누군지 모를 손에서부터 주사위가 굴러갔다.

 

 

 

 

Posted by 렌토상 :

 

 

 

* 사탕수수님의 COC 시나리오 사룡장락 1부를 기반으로 작성된 플레이로그 소설화임을 기재합니다.

* 사룡장락 1부 시나리오 전체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접은글 열람시 주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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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마는 홀로 어둠속에 서 있었다.

숨결같은 흰 안개가 일렁였다. 자신의 모습조차 분간할 수 없을만큼 천지가 암흑이었다. 심해와도 같이 막연하고도 깊은 어둠, 정적. 적마에게 있어서는 삶의 일부와 다름없는 감각이었기에 주저없이 앞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완연한 고요함을 깨고 발 아래가 찰박이며 물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에도 부딪히지 않고 끝없이 퍼져나가다 잦아드는 출렁임이 먹먹하게 울리며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적마는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거리가 좁혀져간다. 가까워진다. 이윽고 그것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을 때, 땅이 울렸다. 미세한 진동과 함께 무언가 발치에 스며들어왔다. 바닥에 얕게 깔려있던 물이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내음이 찝찔하고 포말이 느껴졌다. 바닷물이다. 순식간에 밀려왔다. 저 멀리서 시작된 강한 울림이 거세어지다 종국에는 파도가 되었다. 한순간에 거대한 몸집을 일으켜 적마를 집어삼켰다. 속수무책으로 휩쓸린 그는 검은 수면위로 손을 뻗으며 생각했다.

이 진동은 누군가의 목소리일것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아주 거대한 무언가의 울음소리라고.

그는 무력히 침전했다. 침전하며, 자신을 향해 힘껏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깊은 어둠을 보았다.


 

*

 

 


적마는 물 밑에서 끌어올려지는 기색으로 눈을 떴다. 아침이다. 드문드문 벽지가 울어난 초라한 천장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 뒤로 난 창문에선 강물이 넘실대고, 사람들이 웅성대고, 자전거 종이, 고물 오토바이가, 제멋대로 울리고 지나가고 덜컹이고… 그것들이 한데 아스라이 어우러져 지나치게 평온했다. 거처로 지내던 아파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추레하고 좁은 공간이었지만 낯설게 느껴질 만큼 밝았는데 묘한 단내가 풍기는것도 그랬다. 이마저도 꿈인듯 했다. 적마는 욕을 중얼거리며 옆으로 뒤척여 몸을 웅크렸다. 반쯤 뒤집힌 이불을 다리 사이에 끼고 다시 잠에 들려던 차에 별안간 쎄한 기분이 들어 눈을 뜨자 영원이 국자를 번쩍 들고있었다. 적마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서야 만족한 얼굴로 웃는 것이다. 영원이 손을 움직였다.

「밥 먹고 주무세요.」

오늘같은 날에 재수대가리 없게 영 뒤숭숭한 꿈을 꿨다. 적마는 잠이 덜 깨 쉬이 인상을 펴지 못하고 국자를 까딱이며 주방으로 향하는 영원의 뒷모습만 봤다. 그 애가 한참 좁은 조리대 위에 둔 접시를 상으로 옮겨놓을때에야 정신을 차리고 바지부터 꿰어 입었다. 상의에 팔을 밀어넣으며 침대에서 내려와 영원이 펼쳐준 상 앞에 앉았다. 적마는 그렇다쳐도 영원은 체격이 그렇게 크지 않았는데 둘이 마주 앉으면 방이 꽉 찼다. 가뜩이나 좁은 방안의 빈 곳마다 어제 읽은 신문이나 일회용 플라스틱 식기같은 쓰레기를 알차게도 쌓아놔서 그렇다. 먼지는 덤이다. 영원은 제 몫의 식빵을 들어 한입 베어물며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든 오른손을 코 앞에서 돌렸다.

「돼지.」
「지금 나보고 돼지새끼란 거냐?」
「돼지우리라구요.」

아휴, 하는 한숨이 뒤따랐고

「방 좀 치우고 살지.」

적마는 보는척도 않고 숟가락을 들었다. 오늘 아침은 버터와 연유를 양껏 바르고 위에 샛노랗게 스크램블 에그를 올린 식빵과 마카로니 스프다. 로스햄을 곁들이고 닭육수로 만들어 뽀얗게 기름기가 돌았다. 제법 나쁘지 않은 식사들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부엌에 있는게 이빠진 접시 하나뿐인걸 보고 영원이 적마의 지갑을 슬쩍해 프라이팬이며 식기를 사들인 값이다. 요망한게 적마의 것은 투박하고 촌스러운 접시를 사놓고 지 것은 자잘한 꽃무늬가 그려진 예쁘고 알록달록 한걸 샀다. 가격도 50위안이나 차이가 났다. 적마는 영원이 햄 위주로 떠주는 스프를 후룩 들이마시고 손을 움직였다.

「계집애가 겁도 없이 남자 방에 막 넘어오긴.」
「아저씨가 남자에요?」
「지랄, 그럼 여자냐?」

이번엔 영원이 콧김을 흥 내뿜으며 딴청을 부렸다. 한쪽으로만 치우친 까만 앞머리가 펄럭이다 다시 조용해졌다. 5년 전, 영원은 적마에게 거두어졌다. 아이는 날 때 부터 귀가 들리지 않았지만 그때까지 필담과 독순술은 물론 수어마저 제대로 배우지 못해 어줍잖은 의사소통과 비언어적 표현만으로 세상을 살아왔다. 눈치가 없었다면 진작 죽었을거다. 이제는 그 모든게 능숙해질뿐더러 '좆까'나 '씨발'같은 욕까지 꼴리는대로 구사할 수 있게 된 건 어릴 적 농인 아래에서 자란 적마의 도움이 컸다. 말문을 틔워줬더니 이런 선머슴 새끼였을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적마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식빵을 먹으려 하는데 밖에서 무겁게 쿵, 쿵,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집이 얼마나 허술한지 육중하게 방 전체가 진동해 영원도 문을 바라봤다. 밖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

"신입, 안에 있나? 곧 입단식이다."

들리지 않는 영원은 진동이 멈추자 문을 가리키고 손을 움직였다. 「누구 왔어요?」 적마는 이죽대는 목소리로 욕을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입단식이라고.」 가는길에 아이에게 전해주며 고작 몇걸음이면 닿는 현관문을 열었다. 영원은 관심없이 밥이나 마저 먹었다.

문 앞엔 거구의 남자가 있었다. 온 몸에 새겨져있는 흉터를 보니 바로 떠올랐다. 이름은 만독으로 한때 적마가 현무회였던 시절에 있었던 조직원인데, 이젠 어느정도 자리를 잡았는지 꼴에 고참이라도 된 모양이었다. 그래봤자 말단 간부에 불과하니 제 눈앞의 존재가 한 때 어떤 자였는지는 꿈에도 모를거다. 알았으면 저 눈깔부터 곱게 못 떴을테니. 만독은 적마보다는 못해도 제법 근육질의 덩치를 정장안에 구겨넣고 있었고 키는 반뼘이 더 컸다. 두꺼운 눈썹아래 까만 눈이 적마를 응시하다 무뚝뚝하게 물었다.

"준비는 끝냈나?"

적마는 문틀에 기대 짝다리를 짚으며 대답했다.

"아무렴, 어련히 기억하고 있으려고... 걱정 마십쇼."
"10시다. 시간 맞춰 아래로 내려오면 되고."
"거 참 말 많으십니다 알았다는데."

가늘게 뜬 시선에 적마는 "식사 중이라 그런데, 용건 끝났음 실례 좀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연령대를 가늠하는건지 꼽이라도 주는건지 만독은 말없이 적마를 응시하다 "늦지 말도록. 중요한 입단식이니." 하고 옆방으로 넘어갔다. 그 사이 영원은 자신의 몫은 물론 적마의 몫까지 전부 먹어버리고 유리병에 담긴 밀크티를 마시고 있었다. 적마는 양손을 받치듯 들어 사라진 식사에 대한 억울함과 의문을 표출하는 자세를 취했다. 영원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밀크티나 탈탈 털어마셨다.

 


살다살다 그 빌어처먹을 입단식을 또 치르게 될 줄은 몰랐다.

적마는 현무회가 관리하는 홍등가에서 진소여라는 매춘부에게 자랐다. 쪽빛의 긴 머리카락이 비단같이 매끄럽고 크고 깊은 눈은 해청석처럼 영롱해 아직까지도 선명히 그릴 수 있는 대단한 미인이었는데 귀머거리라 그런지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였다. 그 시절은 추억이라기보단 삶의 잔재에 가까워 지금에 이르러서는 많은 것을 잊어버렸다. 그가 가르쳐준 수어로 대화를 하고 이따금씩 낡은 식당에 데려가 사주었던 군만두의 텁텁함 정도가 올해 쉰 살이 넘은 적마에게 있어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적마가 여덟살 때 진소여는 가게의 돈을 가지고 도망치다 조직원에게 걸려 죽었다. 그의 마른 손을 잡고 있었던 적마는 저까지 죽이려드는 사람들의 허리춤에서 총을 빼앗아 둘을 쏴죽였다. 머리가 핑도는 총성과 팔뚝까지 얼얼한 반동을 버티다 까무룩 기절하고 눈을 뜬 곳이 조직이었다. 마음에 드는 애새끼 하나 주워다 심부름꾼이나 칼받이 시키는게 흔하진 않아도 아예 없진 않았으니, 적마는 그렇게 현무회에 발을 들이게 됐다. 그곳에서 선우 안현을 만났다.

처 죽일놈의 선우 안현.
그 자식을 떨어트리기 위해 7년을 밑바닥 구렁텅이에서 기다려왔다.

적마를 주워온 조직원은 그 눈깔이 마음에 든다며 곧 잘 임무에 데리고 다녔다. 칼과 총을 쥐고 어떻게 해야 어른들을 죽일 수 있는지, 그들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줬고 자질을 인정받아 적마는 열다섯에 입단식을 치러 3년 만에 장대인의 후계자가 되었다. 부모가 둘 다 조직원이고 오직 현무회를 위해 태어나 대접 하난 융숭했던 안현은 입단식도 늦었고, 서른 하나에 간신히 네번째의 자리에 올랐다. 적마가 임명과 동시에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사라지고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도 주의사항이 된 것과 다르게 안현은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렀다. 이름만 후계자일 뿐 결국 아무것도 아닌 채 끝날거라고, 장대인의 뒤를 이어 해대인이 학라에 군림할거라고 모두 입을 모아 말하던 가운데 안현은 보란듯이 적마의 어깨에 칼을 박아넣고 온갖 죄를 뒤집어씌워 파문시켰다. 장대인도 그 탐욕을 알았으나 어찌 할 방도가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신의 목도 따다 바칠놈이다."

장대인은 개탄하며 말했다. "아귀 새끼를 들인 모양이다." 라고. 안현은 가장 가까이 있는것부터 차근차근 잡아먹어가며 잔혹하고 더러운 술수를 마다치 않았다. 과시와도 같은건 결국 기를 쓰고 갈증과도 같은 자신의 열등감을 감추고자 했기 때문이다. 영원의 부모와 쌍둥이 동생도 그런 안현의 손에 죽었다. 여러 조직들의 시다짓을 하던 사람들이었는데, 현무회의 코카인을 나르다 25kg를 빼돌린게 발각 된 것이다. 주도자들만 죗값을 물고 끝날걸 안현이 개입하면서 그 가족들까지 전부 처형의 대상이 되었다. 제일 어린게 고작 네살배기였다. 영원은 그 시체더미들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고, 안현이 자신만큼이나 괴롭게 죽어갈 모습을 보기 위해서 살아갔다. 그리고 때가 됐다.

7년 전, 적마를 시작으로 안현은 남은 다섯명의 후계자들 또한 남김없이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기다렸다는 듯 현무의 문양을 몸에 새겨 장대인보다 크고 화려하게 모가지를 치켜든 거북과 두마리의 검은 뱀이 안현의 팔을 타고 내려왔다. 그가 몇십년에 걸쳐 키워온 탐욕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다. 취임식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하늘로 오르려는 현무를 떨어트릴 가장 완벽한 기회가 아니던가.

두 사람은 선우 안현을 죽이기 위해 이 곳에 왔다.

 


적마는 물끄러미 영원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딱 제가 후계자가 되었을 때의 나이가 된 아이는 숨만 간신히 붙어있던 5년 전보다 키도 쑥 커졌고 팔다리도 제법 단단해졌다. 앳된 티가 남아있어도 개백정짓 밖에 할 줄 모르는 아저씨와 그보다 더한 아저씨의 친구에게 거둬져 예쁜 옷감이나 좋은 책이 아닌 사람 죽이는 총을 만지며 사는 것 치고는 꽤나 적응도 잘했다. 그러니 설령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 곳이라해도 데려온 것이다. 두고가면 아저씨가 보는 앞에서 자살하겠다며 겁도 없이 입에 산탄총을 쑤셔넣는 바람에 달리 선택지가 없긴 했다. 하여간, 계집애 주제에 곰살맞은 구석이 추호도 없다.

적마는 적당히 시선을 거두고 냉장고를 열어 어제 먹다남긴 군만두를 꺼냈다. 뚜껑을 열어 차갑고 딱딱하게 식은걸 우물거리며 "너 임마, 어딜가도 굶어죽진 않겠다." 하고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영원은 저 혼자 상에 차려놓은 음식을 다 먹어치운 주제에 아랑곳하지 않고 군만두에 눈독을 들였다. 사특하기 짝이 없는 적마의 눈매가 마뜩잖게 치켜올라가 옛다, 던져주는 용기를 영원은 고양이처럼 잽싸게 낚아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군만두를 꺼내랴, 수어로 말하랴,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아저씨, 새침떼기가 따로 없네요.」

적마는 헛웃으며 다시 자리로 가 앉았다. 팔을 뻗어 담배와 신문을 집어들며 대답했다.

「어른에게 세침떼기가 무어냐, 버릇없게.」

영원은 소리 없이 히죽 웃었다.

 

 


적마는 담배갑 안에서 한개피를 꺼내 물고 라이터를 켰다. 방구석에 대충 굴러다니는 싸구려중의 싸구려답게 연신 헛손이 돌다 간신히 불이 붙었다. 깊게 한모금 빨아들이며 신문을 폈다. 학라 자체에서 찍어내는 신문이라 전면부터 장대인의 부고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그 뒤로 몇페이지에 걸쳐 그의 죽음에 대한 원통함으로 할애하고, 나머지는 의미없는 찌라시만 와글와글했다. 그나마 건진거라곤 최근 학라에 개구리가 늘었다는것 정도였다. "요즘엔 씨발, 신문에 괴담도 막 실어주나 보지?" 적마가 궁시렁대며 미지근한 커피를 마시는 동안 영원은 상을 가져가 설거지를 하고 불만스런 소리를 웅얼거리며 창을 열어 청소를 했다. 뿌연 연기가 방안을 가득 채우다말고 흩어졌다.

볼것 없는 신문을 의미없이 펄럭이다 적마는 담배를 껐다. 슬슬 나갈시간이 됐다. 자리에서 일어나 싱크대 옆면을 발로 툭 차 손의 물기를 옷자락에 닦아내던 영원의 고개를 들게했다.

「청소는 이제 됐고, 너도 가서 준비하지 그러냐.」
「먼저 가버리지 말고 나 기다려주세요.」
「하는거 보고.」

영원은 단번에 입을 대빨 내밀었다. 일단 가라니 가는데 영 못미더운지 신발을 구겨신으며 벽을 두드렸다.

「진짜 먼저 갈거에요?」

적마는 반쯤 떨어진 문짝이 망가지지 않도록 옷장을 열다말고 입모양을 크게 해 대답했다.

"그럼 앞에서 기다리던가."

그제서야 아이가 입을 쑥 집어넣고 방을 나갔다. 적마는 옷장안에 걸려있는 양복 한 벌을 침대위로 내팽겨치며 옷을 벗었다. 인정머리도 없는 땅거지 새끼들, 보금품이라고 내놓는게 하나같이 낡아 빠진 구닥다리 뿐이다. 이렇게 아무말도 않다보면 옆방 혹은 위 아래 방에서 걸어다니는 소리, 물건 질질 끄는소리, 뭐라 중얼대고 욕하는 소리 따위가 어렴풋이 울렸다. 지금은 낮이라 그렇다쳐도 밤까지 층간소음이 이어질때면 몹시도 거슬렸다. 창밖마저 요란하니 끄트머리가 누르스름하게 삭아 먼지 날리는 커튼도 떼지 못하는 것이다. 혁대를 채울 때 옆에 있는 영원의 방인지 어딘지 모를 곳에서 우당탕거리는 큰소리가 났다. 어떤 병신새끼가 드디어 수리비를 뜯길 모양이다. 이죽이며 자켓을 껴입었다. 셔츠는 그렇다 쳐도 이것까지 길이에 비해 품이 덜 맞아 딱 맞는 팔부분을 잡아 늘리는데 안주머니에 무언가 들어있었다. 담배갑이었다.

안이 헐거운게 딱 돛대만 남았다. 뒷면에 사인펜으로 적은 글씨가 있었다.

『하나 남은 것에는 행운이 있다. 이것이 당신에게 행운을 가져다주기를.』

적마는 입을 삐죽였다. 행운은 니미 씨벌, 기도 안 차는 소리다.

"지 가족중에 혼자 덜렁 살아남아도 저딴소리 하나 보자, 씹새끼."

혼잣말에 대답이라도 해주듯 신입들은 나와 준비하라며 밖에서 만독이 외쳤다. 적마는 넥타이의 마지막 매듭을 느슨히 마무리짓고 선글라스를 꼈다. 여름이었나, 영원이 하석열의 마작판에 끼어들자마자 천화를 내서 쓸어모은 판돈으로 사준건데 값이 좀 된다고 제법 매끈한 맛이 있었다. 손재주 하난 인정한다. 아이가 까만색으로 염색해준 머리도 원래의 붉은빛은 감쪽같았다.

밖으로 나와 구두끈을 조여매던 영원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걸음을 잠시 절뚝거린다 했더니 아무래도 그 옷장 문에 발등을 정통으로 찧은 병신새끼가 이 녀석이었나 보다. 난간 너머 1층 건물 앞에는 이미 몇몇이 나와있었고, 다른 방에서도 부랴부랴 뒤따라오는 놈들까지 멀쩡히 생겨먹은게 단 한명도 없었다. 꼴에 학라에서 한 몫 크게 잡을 수 있는 현무회에 들어간다고 저마나 눈에 힘을 주거나 머리빡을 비뚜름히 내놓으며 어깨를 거들먹대는 꼬라지가 적마의 눈엔 우스울 따름이었다. 영원도 비슷하게 느꼈는지 코 밑을 훔치는 척 하며 몰래 비웃는게 보였다. 두 사람을 포함한 신입들의 정렬을 확인한 뒤 맨 앞에 있던 만독이 뒷짐을 지고 섰다. 전원 각을 잡아 그 행동을 따라했다.

"내 이름은 만독이다."

무슨 한자를 쓰는지 몰라도 좆같은 이름이라고 영원은 생각했다.

"현무회의 행동 대장이고, 본래 안현 님을 보필하는것이 주된 임무이나 입단식이 끝나기 전까지는 너희들을 맡기로 했다. 새로 들어오는 형제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시다는 뜻이니, 그 마음을 배반하지 말도록."

선글라스 위로 적마의 눈썹이 일순 꿈틀했지만 어금니를 꽉 깨물고 인내했다. 슬금슬금 자세가 흐트러지던 영원이 발로 적마를 툭 건들고 손을 작게 움직였다. 「형제들이라니, 좆까라 그래요. 그쵸.」 이어 선두에서 걸어가는 만독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띨빵이, 머저리, 안현 그 새끼가 천하의 개새끼인줄 모르고 꼬리치는 병신들. 평소 같았으면 계집애가 상스러우니 말 좀 곱게 하라고 한마디 했겠지만 주어가 안현인건 봐줄만 해 적마는 고개만 끄덕여줬다.

학라의 복잡한 뒷골목을 따라 걸어갔다. 만독을 알아본 주민들은 알아서 길을 터주고 뭣모르고 튀어나가는 아이들을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양 옆으로 물때가 고인 원색의 천막 아래 출처불문의 물건을 내다파는 좌판들을 뒤로 하고 점점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과 건물의 좁은 틈새 사이 내걸린 빨래가 종종 머리맡을 스쳤다. 그래도 사람이 살아보겠다고 검은 곰팡인지 녹물인지 모를것이 흘러내린 외벽으로 실외기가 따개비처럼 붙어있었다. 발 밑의 하수구에서 썩은내가 올라왔다. 배수관에도 담배꽁초가 수북히 쌓였다. 어느 양아치가 그린지 모를 낙서, 한쪽 다리가 빠져 기울어진 의자, 미라처럼 말라 비틀어진 가슴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노인네… 그 지저분한 것들을 지나 마침내 훨씬 더 지저분한 폐건물에 다다랐다. 수군거리는 소리와 입모양이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에이 씨발, 생각보다 별거 아닌거 아냐?"
"현무회에 들어가면 다 형제라더니, 형제를 이런데에서 맞이하는게 말이 되냐?"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남자가 어울리지 않는 연분홍색 입을 놀렸다.

"… 장대인. 장대인이 서거하셔서 그렇지, 뭐."
"그 선우 안현이란 놈은 아직 산주가 아니잖아."

이곳까지 오는 동안 장대인의 흔적이 내내 따라붙었다. 어느 곳에도 문 앞에는 흰 꽃이 걸려있었고 검은 옷을 입은 아이들은 종이 비행기를 들고 추모곡에 장대인의 이름을 넣어 불렀다. 아직까지도 그의 이름 세 글자가 가진 힘이 학라에 잔재하는 것이다. 자리는 신뢰를 만든다. 신뢰는 사람을 제 아래에 거느리고 충성을 다해 따르게 하는 힘을, 권력을, 이윽고 천하를 가져다준다. 지금의 안현이 무엇보다도 손에 넣어야 할 것이지만 그 꼴을 순순히 볼 바에야 차라리 혀 씹고 죽는게 나았다. 니미럴, 그 개자식은 옥좌는 커녕 평생 변기에도 앉지 못하게 조져버릴거다.

만독이 문을 두드렸다. 벌겋게 녹이 슬고 칠이 다 벗겨진 쇠문이 탕, 진동하고 되돌아오는 과정에서 마찰음을 내어 듣도 못한 소리가 났다. 기다렸다는듯 문이 열렸다. 발을 들인다. 열몇명 남짓한 사람들의 발소리가 불규칙하게 울리고 묵직하게 문이 닫혀가던 그 때, 무언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적마가 반사적으로 근원지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그를 바라보고 있는것은 총구였다.

검은 총구. 그것이 영원을 포함해 다른 이들을 겨누고 있었다.

여태 같은 신입이라 했던 일부가 남은 인원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신입 안에 감시자를 섞은건 그렇다쳐도 입단방식이 이딴식으로 바꼈다니, 무식한것도 정도가 있다. 침착하게 손을 들거나 당황해 욕을 더듬는 사람들과 함께 전원 포위된 상태에서 달리 반격할 방도는 없었다. 총알이 안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총은 만병지왕이다. 그나마 대책이라곤 자세가 가장 좋지 않은 놈을 기준으로 퇴로를 파악해 총을 뺏든 고기방패로 쓰든 몸을 숨기는게 다 였다. 최대한 빠르고, 짧게. 영원과 시선을 교환했다. 남동쪽의 철근더미를 파악하자마자 총성이 선수를 쳤다. 불협적으로 총을 맞은 사람들에게서 쇳비린내와 붉은 핏물이 뿜어져나와 사방으로 튀었다. 하나 둘 쓰러진 가운데 적마와 영원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총을 든 사람들은 예사롭게도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시체를 끌어냈다.

"신입을 가장해 현무회에 잠입한 자객이다."

안쪽에서 누군가 말했다. 특유의 긁는듯한 낮고 짙은 목소리가 선명히 박혀들어와 뇌리에서 공명했다. 짐승의 아가리와도 같은 어둠에서부터 구두굽소리가 다가와 이내 모습을 드러냈다. 음울한 낯빛에서도 번뜩이는 붉고 검은 눈, 오만한 시선, 위압적인 체격과 소매 아래 두터운 양팔에는 뱀의 꼬리가 휘감겨 있었다. 그 모습을 두 사람은 단 한번도 잊은 적 없다.

선우 안현이다.

고양감과 함께 전신에 피가 돌면서 모든 감각이 그를 향했다. 세포 단위에서부터 부르짖는다. 그간 나의 눈은 저 자의 치욕스러운 몰락을 지켜보기 위해 트여있고, 나의 귀는 저 자의 고통스러운 비명을 듣기 위해 뚫려있으며, 나의 입과 손가락과 심장까지 저 자를 산채로 씹어 삼키기 위해 존재했다고. 오직 그것만을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장 대인이 죽었다고 나를 우습게 봤나 본데…."

그가 낮은 계단을 내려와 두 사람의 앞으로 걸어오자 만독이 영원의 뒷통수를 깊게 눌렀다.

"어디서 고갤 빳빳이 처들고 있나, 숙여라."

우악스러운 힘에 고개가 고꾸라지며 짧은 단발머리가 흘러내렸다. 그 까만 틈새로 영원의 금색눈이 서슬 퍼렇게 희번덕거렸다. 적마는 진작 숙였던 고개를 더 깊숙히 내렸다. 손바닥에 손톱이 내리박힐 정도로 주먹만 으스러 쥔 채 침묵했다. 제 목숨이 아홉개라도 되는것마냥 구는 저 계집과 달리 적마는 치기를 느끼기엔 너무 나이가 많았고 허투로 일을 그르칠 아량과 자비 따위도 없었다.

그 어떤 맹수라도 먹잇감을 노릴 땐 기척을 지우고 숨을 참는법이다.

안현의 기척이 목전에서 멈춰섰다. 두 사람이 자신에게 얼마나 깊게 복종을 표하는지 훑어보는 시선을 따라 우수수 소름이 끼쳤다. 모멸감이 든다. 역겹다. 그가 만족스레 웃으며 담배를 꺼내 물자 만독이 정중히 불을 붙여줬다.

"남자 하나에 여자 하나라… 그래, 그래야지. 하나 남은 것에 행운이 따르리라는 점괘가 맞을지도 모르겠군."

그의 숨 한모금에 선단이 붉고 까맣게 타들어갔다. 느리게 연기를 뱉어낸 뒤 읊조리는 뜻모를 말에 적마는 문득 담배갑에 적혀있었던 문구가 떠올랐다. 니미 씨벌. 또 같은 욕이 맴돈다.

그의 강냉이든 면상이든 당장에 갈겨버리고 싶은 적마와 영원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현은 좆같이 황송하게도 옘병할 옥체를 친히 숙여 직접 두 사람의 허리춤에 무언가를 달아주었다. 오묘한 포말 무늬를 가진 대모(玳瑁)갑중에서도 흑갑으로 만든 패였다. 몹시도 잘 다듬어져 반지르르하게 윤이 나는 뒷면에 현무회라는 세글자가 적혀있었다. 안현은 절반쯤 탄 꽁초를 버리고 두 사람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줬다.

"바로 너희들 말이다."

적마가 장대인에게 하사받은 흑갑패를 깨부순건 그 누구도 아닌 안현이었다. 파편에 손이 찔려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산산조각이 나도록 짓이겼던 주제에 이제와서 새로운 것을 달아주고 있다. 배꼽이 웃을 지경이다. 파문시켜 시궁창에 버려놓은 형제가 살아있단걸, 살아서, 고개를 숙이는것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을 죽이기 위해 혈안을 뜨고 돌아왔단걸 알게 되면 안현의 낯짝이 과연 어떨까 싶었다. "그럼 이따들 보지." 안현은 유유히 두 사람을 지나쳐갔다.

멀어지는 기척에 영원은 고개를 들었다. 안현의 곁에 서있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각각 노인과 애새끼였는데, 반백의 머리를 깔끔히 빗어올린 노인은 입고있는 옷부터 큰키에 각진 뼈대가 도드라져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인상이었다. 완고해보이는 얼굴이 적마와 영원을 바라보다 이내 앞을 향했다. 그 옆을 애새끼가 뒤따랐다. 가벼운 걸음걸이에 길게 땋은 머리가 개의 꼬리처럼 흔들렸다. 저보다는 나이가 있어보였지만 가느다란 눈을 휘며 살랑살랑 손까지 흔드는 꼴에 영원은 인상을 구기며 입안에서 열심히 욕을 곱씹었다. 적마도 가는 시선으로 응시 할 뿐이었다. 그들의 뒷모습을 향해 인사를 건네던 만독이 허리를 펴고 턱을 까딱였다.

"우리도 이동한다. 따라오도록."

두 사람은 묵묵히 걸었다. 목울대를 꾹 조여오는 것이 있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끓어오르던 분노와 살의는 발열점을 넘어선 순간 거짓말처럼 고요해지고 이제는 희열만이 남았다. 그토록 다시 만날 날 만을 기다려오지 않았던가. 안현의 목숨줄은 이제 손 안에 들어왔다. 이것을 단단히 움켜쥐고, 잡아당겨, 벼르고 벼려온 이빨로 찢어발길 순간이 머지않았다. 바로 오늘로부터, 드디어, 드디어!

이열종대로 세워야 했던 인원이 이제는 적마와 영원만 남았다. 미로 같은 길을 걷고 여러 건물을 거쳐 또 다시 어딘가로 향했다. 사치스럽고 휘황찬란한 장식을 보며 적마는 이 곳이 현무회의 본관에 있는 연회장이라는것을 깨달았고 영원은 생전 처음보는 시큰거림에 눈을 비볐다. 만독이 저 똘추가 길을 모르는건지 아니면 숨겨진 길을 신입들이 외우지 못하게 할 속셈인지 돌아도 너무 돌아왔다. 그럴수록 지난 기억은 더더욱 또렷해졌다. 곳곳에 있는 문에서 저마다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리다 별안간 찬물을 끼얹듯 숨을 들이삼키고, 조용해졌다. 빼곡한 시선들은 오직 단상 위로 올라서는 안현에게로 향했다.

주제에 제법 권위로운척 구는게 가소로웠지만 다른 이들에겐 마음이 사로잡히는 무언가가 있으리라. 주변을 넓게 둘러 모두가 자신을 올려다 보는것을 확인한 안현이 입을 열었다.

"오면서 불미스러운 일을 겪은 사람들이 있겠지만, 괘념치 않길 바란다."

분위기가 잠시 술렁였으나 안현의 위압감에 다시 가라앉았다. 절제된 손동작이 그를 따랐다.

"우리는, 어제까지 가장 멀리 자리했으나 오늘부터는 가장 가까이 산다."

적절한 호흡을 섞고

"우리는 가족이다."

내놓은 말에는 심원한 호소력이 있었다.

"이 이름은 신뢰와 결속의 언어로 쓰인다. 어떤 형제도 너의 위기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며, 너희 또한 응당 그래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현무의 자비를 시험하지 말도록. 나는 인내심이 깊지 않다. 그러니 너희가 내게 예우를 받고 싶다면, 그에 걸맞는 충성을 바쳐야 할 것이다."

나직한 연설을 멈추고 안현이 손을 들었다. 허리춤에 흑갑패를 단 조직원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같은 것을 달아주기 시작했다. 일사분란한 그 모습을 안현은 대단히 흡족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명예로운것을 하사해주는것 마냥 우월감과 자부심에 흠뻑 도취되어 있었다. 그런 안현에게도 모두와 같은 흑갑패가 달려있다. 그가 말을 이어갔다.

"누군가 너희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현무의 핏줄이라고 답해라. 너희가 해하는 자에게는 현무의 분노가 뒤따를 것이고, 은혜를 베푼 자에게는 기쁨과 보답이 함께 할 것이라는 사실을 뼛속 깊이 새겨둬라."

그가 힘있게 단상을 내리쳤다.

"잊지 마라."

잊으래도 잊지 않을것이다.

"우리는 하나다!"

저 씨발놈의 모든것을.

 


감격하다 못해 눈물을 줄줄 흘리는 몇몇 천치들을 보며 영원은 애써 역겨움을 참아냈다. 고개를 숙였는데도 울렁거리는 눈 앞에 안현의 입모양이 잔상처럼 남았다. 가족, 가족이라 했다. 저 좆같은 새끼는 우리 엄마아빠는 물론 죄 없는 내 동생까지 죽여놓은 주제에 진정으로 가족이 무엇인지나 알까? 감히 그것을 입에 담을 자격이나 되나? 되물어본들 소리 내어 말 할 수 없는 영원에겐 불쾌함만 복기할 뿐 이었다. 적마도 그러했다. 더러운 골목길에 나돌아 다니는 개새끼도 같은 핏줄끼리는 물어뜯지 않는다. 하물며 인간의 가죽을 쓰고 꾸역꾸역 현무를 탐하는 저 후레자식하고 어찌 가족이라 할 수 있겠는가. 영원은 선글라스 너머로 안현을 응시하는 적마의 팔을 툭 건들이고 손을 움직였다.

「좆같아서 토 할것 같아요.」

적마가 영원을 바라봤다. 저와 달리 조금 헐렁한 정장차림의 아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다 대답했다.

「너는 무슨 좆도 없으면서….」
「아저씨가 봤어요?」

기분이 좋지 않았던 탓인지 영원이 으르렁대며 항의했다. 적마가 못본척 고개를 돌리자 기어이 그쪽으로 따라가 앞에서 손을 움직이는 것이다.

「나한테 좆이 달렸는지 안 달렸는지 아저씨가 봤냐구요!」
"아이고, 정신 사납다 이 년아!"

결국 작게 한소리하며 치켜든 까만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아줬다. 나름 힘조절을 했는데도 얼얼한지 영원은 켁, 하는 막힌 소리를 내며 머리를 부여잡고 고꾸라졌다. 젖히듯 일어나 찔끔 눈물이 맺혀 흘겨보는 시선을 적마도 마주 흘겨봐줬다. 영원이 가운데 손가락을 들었다. 적마는 두 손으로 다 들어줬다.

두 사람이 그 지랄을 하는 사이, 안현의 지시에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수행원들이 술병을 하나씩 들려주었다. 성인 남자의 반뼘정도 되는 작은 자기술병이다. 안현의 탐욕만큼이나 번들거리는 검은 몸체에 날카로운 음각 사이로 새빨간 주묵이 스며들어 현무의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그 외에도 신입들은 휴대폰과 나이프를 더 받고, 이어 노인과 애새끼, 안현에게까지 술병이 전달되었다. 다시금 그에게로 이목이 집중되었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가운데 그가 술병을 들었다. 단상 아래의 사람들도 손에 쥔것을 일제히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형제를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위하여!"

우레와 같은 복창이 터져나오고 모두가 안현과 함께 술을 들이켰다. 손에 쥔 붉은 뱀 두마리의 눈을 응시한 순간 적마에게는 떠오르는것이 있었다. 36년전의 오늘이다. 적마의 입단식에 안현은 없었다. 그는 늘 자신의 등 뒤에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우월해야할 자신보다 먼저 장대인이 하사한 술을 기울이는 적마의 모습을, 선배로서 형제로서 직접 흑갑패를 달아주고 기꺼이 등을 맡겼던 모습을 올려다보며 안현은 어떤 낯짝을 하고 있었던가. 문득 어깨죽지가 아려왔지만 그 전에 먼저 웃음이 샜다. 일련의 과정이 우습고, 같잖고, 그래서 유쾌할 따름이다. 적마는 옛추억을 회상하는 늙은이의 태도로 남들보다 조금 늦게 술을 들이켰다. 목넘김이 쓰고 독했다.

이로써 7년만에 현무의 소굴로 돌아왔다. 사흘이 남았다. 고작 그 뿐 일지라도 선우 안현을 떨어트리기엔 더할나위없이 충분했다.
이제 더는 기다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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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렌토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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