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탕수수님의 COC 시나리오 사룡장락 1부를 기반으로 작성된 플레이로그 소설화임을 기재합니다.

* 사룡장락 1부 시나리오 전체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접은글 열람시 주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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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마는 홀로 어둠속에 서 있었다.

숨결같은 흰 안개가 일렁였다. 자신의 모습조차 분간할 수 없을만큼 천지가 암흑이었다. 심해와도 같이 막연하고도 깊은 어둠, 정적. 적마에게 있어서는 삶의 일부와 다름없는 감각이었기에 주저없이 앞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완연한 고요함을 깨고 발 아래가 찰박이며 물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에도 부딪히지 않고 끝없이 퍼져나가다 잦아드는 출렁임이 먹먹하게 울리며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적마는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거리가 좁혀져간다. 가까워진다. 이윽고 그것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을 때, 땅이 울렸다. 미세한 진동과 함께 무언가 발치에 스며들어왔다. 바닥에 얕게 깔려있던 물이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내음이 찝찔하고 포말이 느껴졌다. 바닷물이다. 순식간에 밀려왔다. 저 멀리서 시작된 강한 울림이 거세어지다 종국에는 파도가 되었다. 한순간에 거대한 몸집을 일으켜 적마를 집어삼켰다. 속수무책으로 휩쓸린 그는 검은 수면위로 손을 뻗으며 생각했다.

이 진동은 누군가의 목소리일것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아주 거대한 무언가의 울음소리라고.

그는 무력히 침전했다. 침전하며, 자신을 향해 힘껏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깊은 어둠을 보았다.


 

*

 

 


적마는 물 밑에서 끌어올려지는 기색으로 눈을 떴다. 아침이다. 드문드문 벽지가 울어난 초라한 천장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 뒤로 난 창문에선 강물이 넘실대고, 사람들이 웅성대고, 자전거 종이, 고물 오토바이가, 제멋대로 울리고 지나가고 덜컹이고… 그것들이 한데 아스라이 어우러져 지나치게 평온했다. 거처로 지내던 아파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추레하고 좁은 공간이었지만 낯설게 느껴질 만큼 밝았는데 묘한 단내가 풍기는것도 그랬다. 이마저도 꿈인듯 했다. 적마는 욕을 중얼거리며 옆으로 뒤척여 몸을 웅크렸다. 반쯤 뒤집힌 이불을 다리 사이에 끼고 다시 잠에 들려던 차에 별안간 쎄한 기분이 들어 눈을 뜨자 영원이 국자를 번쩍 들고있었다. 적마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서야 만족한 얼굴로 웃는 것이다. 영원이 손을 움직였다.

「밥 먹고 주무세요.」

오늘같은 날에 재수대가리 없게 영 뒤숭숭한 꿈을 꿨다. 적마는 잠이 덜 깨 쉬이 인상을 펴지 못하고 국자를 까딱이며 주방으로 향하는 영원의 뒷모습만 봤다. 그 애가 한참 좁은 조리대 위에 둔 접시를 상으로 옮겨놓을때에야 정신을 차리고 바지부터 꿰어 입었다. 상의에 팔을 밀어넣으며 침대에서 내려와 영원이 펼쳐준 상 앞에 앉았다. 적마는 그렇다쳐도 영원은 체격이 그렇게 크지 않았는데 둘이 마주 앉으면 방이 꽉 찼다. 가뜩이나 좁은 방안의 빈 곳마다 어제 읽은 신문이나 일회용 플라스틱 식기같은 쓰레기를 알차게도 쌓아놔서 그렇다. 먼지는 덤이다. 영원은 제 몫의 식빵을 들어 한입 베어물며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든 오른손을 코 앞에서 돌렸다.

「돼지.」
「지금 나보고 돼지새끼란 거냐?」
「돼지우리라구요.」

아휴, 하는 한숨이 뒤따랐고

「방 좀 치우고 살지.」

적마는 보는척도 않고 숟가락을 들었다. 오늘 아침은 버터와 연유를 양껏 바르고 위에 샛노랗게 스크램블 에그를 올린 식빵과 마카로니 스프다. 로스햄을 곁들이고 닭육수로 만들어 뽀얗게 기름기가 돌았다. 제법 나쁘지 않은 식사들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부엌에 있는게 이빠진 접시 하나뿐인걸 보고 영원이 적마의 지갑을 슬쩍해 프라이팬이며 식기를 사들인 값이다. 요망한게 적마의 것은 투박하고 촌스러운 접시를 사놓고 지 것은 자잘한 꽃무늬가 그려진 예쁘고 알록달록 한걸 샀다. 가격도 50위안이나 차이가 났다. 적마는 영원이 햄 위주로 떠주는 스프를 후룩 들이마시고 손을 움직였다.

「계집애가 겁도 없이 남자 방에 막 넘어오긴.」
「아저씨가 남자에요?」
「지랄, 그럼 여자냐?」

이번엔 영원이 콧김을 흥 내뿜으며 딴청을 부렸다. 한쪽으로만 치우친 까만 앞머리가 펄럭이다 다시 조용해졌다. 5년 전, 영원은 적마에게 거두어졌다. 아이는 날 때 부터 귀가 들리지 않았지만 그때까지 필담과 독순술은 물론 수어마저 제대로 배우지 못해 어줍잖은 의사소통과 비언어적 표현만으로 세상을 살아왔다. 눈치가 없었다면 진작 죽었을거다. 이제는 그 모든게 능숙해질뿐더러 '좆까'나 '씨발'같은 욕까지 꼴리는대로 구사할 수 있게 된 건 어릴 적 농인 아래에서 자란 적마의 도움이 컸다. 말문을 틔워줬더니 이런 선머슴 새끼였을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적마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식빵을 먹으려 하는데 밖에서 무겁게 쿵, 쿵,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집이 얼마나 허술한지 육중하게 방 전체가 진동해 영원도 문을 바라봤다. 밖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

"신입, 안에 있나? 곧 입단식이다."

들리지 않는 영원은 진동이 멈추자 문을 가리키고 손을 움직였다. 「누구 왔어요?」 적마는 이죽대는 목소리로 욕을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입단식이라고.」 가는길에 아이에게 전해주며 고작 몇걸음이면 닿는 현관문을 열었다. 영원은 관심없이 밥이나 마저 먹었다.

문 앞엔 거구의 남자가 있었다. 온 몸에 새겨져있는 흉터를 보니 바로 떠올랐다. 이름은 만독으로 한때 적마가 현무회였던 시절에 있었던 조직원인데, 이젠 어느정도 자리를 잡았는지 꼴에 고참이라도 된 모양이었다. 그래봤자 말단 간부에 불과하니 제 눈앞의 존재가 한 때 어떤 자였는지는 꿈에도 모를거다. 알았으면 저 눈깔부터 곱게 못 떴을테니. 만독은 적마보다는 못해도 제법 근육질의 덩치를 정장안에 구겨넣고 있었고 키는 반뼘이 더 컸다. 두꺼운 눈썹아래 까만 눈이 적마를 응시하다 무뚝뚝하게 물었다.

"준비는 끝냈나?"

적마는 문틀에 기대 짝다리를 짚으며 대답했다.

"아무렴, 어련히 기억하고 있으려고... 걱정 마십쇼."
"10시다. 시간 맞춰 아래로 내려오면 되고."
"거 참 말 많으십니다 알았다는데."

가늘게 뜬 시선에 적마는 "식사 중이라 그런데, 용건 끝났음 실례 좀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연령대를 가늠하는건지 꼽이라도 주는건지 만독은 말없이 적마를 응시하다 "늦지 말도록. 중요한 입단식이니." 하고 옆방으로 넘어갔다. 그 사이 영원은 자신의 몫은 물론 적마의 몫까지 전부 먹어버리고 유리병에 담긴 밀크티를 마시고 있었다. 적마는 양손을 받치듯 들어 사라진 식사에 대한 억울함과 의문을 표출하는 자세를 취했다. 영원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밀크티나 탈탈 털어마셨다.

 


살다살다 그 빌어처먹을 입단식을 또 치르게 될 줄은 몰랐다.

적마는 현무회가 관리하는 홍등가에서 진소여라는 매춘부에게 자랐다. 쪽빛의 긴 머리카락이 비단같이 매끄럽고 크고 깊은 눈은 해청석처럼 영롱해 아직까지도 선명히 그릴 수 있는 대단한 미인이었는데 귀머거리라 그런지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였다. 그 시절은 추억이라기보단 삶의 잔재에 가까워 지금에 이르러서는 많은 것을 잊어버렸다. 그가 가르쳐준 수어로 대화를 하고 이따금씩 낡은 식당에 데려가 사주었던 군만두의 텁텁함 정도가 올해 쉰 살이 넘은 적마에게 있어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적마가 여덟살 때 진소여는 가게의 돈을 가지고 도망치다 조직원에게 걸려 죽었다. 그의 마른 손을 잡고 있었던 적마는 저까지 죽이려드는 사람들의 허리춤에서 총을 빼앗아 둘을 쏴죽였다. 머리가 핑도는 총성과 팔뚝까지 얼얼한 반동을 버티다 까무룩 기절하고 눈을 뜬 곳이 조직이었다. 마음에 드는 애새끼 하나 주워다 심부름꾼이나 칼받이 시키는게 흔하진 않아도 아예 없진 않았으니, 적마는 그렇게 현무회에 발을 들이게 됐다. 그곳에서 선우 안현을 만났다.

처 죽일놈의 선우 안현.
그 자식을 떨어트리기 위해 7년을 밑바닥 구렁텅이에서 기다려왔다.

적마를 주워온 조직원은 그 눈깔이 마음에 든다며 곧 잘 임무에 데리고 다녔다. 칼과 총을 쥐고 어떻게 해야 어른들을 죽일 수 있는지, 그들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줬고 자질을 인정받아 적마는 열다섯에 입단식을 치러 3년 만에 장대인의 후계자가 되었다. 부모가 둘 다 조직원이고 오직 현무회를 위해 태어나 대접 하난 융숭했던 안현은 입단식도 늦었고, 서른 하나에 간신히 네번째의 자리에 올랐다. 적마가 임명과 동시에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사라지고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도 주의사항이 된 것과 다르게 안현은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렀다. 이름만 후계자일 뿐 결국 아무것도 아닌 채 끝날거라고, 장대인의 뒤를 이어 해대인이 학라에 군림할거라고 모두 입을 모아 말하던 가운데 안현은 보란듯이 적마의 어깨에 칼을 박아넣고 온갖 죄를 뒤집어씌워 파문시켰다. 장대인도 그 탐욕을 알았으나 어찌 할 방도가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신의 목도 따다 바칠놈이다."

장대인은 개탄하며 말했다. "아귀 새끼를 들인 모양이다." 라고. 안현은 가장 가까이 있는것부터 차근차근 잡아먹어가며 잔혹하고 더러운 술수를 마다치 않았다. 과시와도 같은건 결국 기를 쓰고 갈증과도 같은 자신의 열등감을 감추고자 했기 때문이다. 영원의 부모와 쌍둥이 동생도 그런 안현의 손에 죽었다. 여러 조직들의 시다짓을 하던 사람들이었는데, 현무회의 코카인을 나르다 25kg를 빼돌린게 발각 된 것이다. 주도자들만 죗값을 물고 끝날걸 안현이 개입하면서 그 가족들까지 전부 처형의 대상이 되었다. 제일 어린게 고작 네살배기였다. 영원은 그 시체더미들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고, 안현이 자신만큼이나 괴롭게 죽어갈 모습을 보기 위해서 살아갔다. 그리고 때가 됐다.

7년 전, 적마를 시작으로 안현은 남은 다섯명의 후계자들 또한 남김없이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기다렸다는 듯 현무의 문양을 몸에 새겨 장대인보다 크고 화려하게 모가지를 치켜든 거북과 두마리의 검은 뱀이 안현의 팔을 타고 내려왔다. 그가 몇십년에 걸쳐 키워온 탐욕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다. 취임식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하늘로 오르려는 현무를 떨어트릴 가장 완벽한 기회가 아니던가.

두 사람은 선우 안현을 죽이기 위해 이 곳에 왔다.

 


적마는 물끄러미 영원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딱 제가 후계자가 되었을 때의 나이가 된 아이는 숨만 간신히 붙어있던 5년 전보다 키도 쑥 커졌고 팔다리도 제법 단단해졌다. 앳된 티가 남아있어도 개백정짓 밖에 할 줄 모르는 아저씨와 그보다 더한 아저씨의 친구에게 거둬져 예쁜 옷감이나 좋은 책이 아닌 사람 죽이는 총을 만지며 사는 것 치고는 꽤나 적응도 잘했다. 그러니 설령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 곳이라해도 데려온 것이다. 두고가면 아저씨가 보는 앞에서 자살하겠다며 겁도 없이 입에 산탄총을 쑤셔넣는 바람에 달리 선택지가 없긴 했다. 하여간, 계집애 주제에 곰살맞은 구석이 추호도 없다.

적마는 적당히 시선을 거두고 냉장고를 열어 어제 먹다남긴 군만두를 꺼냈다. 뚜껑을 열어 차갑고 딱딱하게 식은걸 우물거리며 "너 임마, 어딜가도 굶어죽진 않겠다." 하고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영원은 저 혼자 상에 차려놓은 음식을 다 먹어치운 주제에 아랑곳하지 않고 군만두에 눈독을 들였다. 사특하기 짝이 없는 적마의 눈매가 마뜩잖게 치켜올라가 옛다, 던져주는 용기를 영원은 고양이처럼 잽싸게 낚아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군만두를 꺼내랴, 수어로 말하랴,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아저씨, 새침떼기가 따로 없네요.」

적마는 헛웃으며 다시 자리로 가 앉았다. 팔을 뻗어 담배와 신문을 집어들며 대답했다.

「어른에게 세침떼기가 무어냐, 버릇없게.」

영원은 소리 없이 히죽 웃었다.

 

 


적마는 담배갑 안에서 한개피를 꺼내 물고 라이터를 켰다. 방구석에 대충 굴러다니는 싸구려중의 싸구려답게 연신 헛손이 돌다 간신히 불이 붙었다. 깊게 한모금 빨아들이며 신문을 폈다. 학라 자체에서 찍어내는 신문이라 전면부터 장대인의 부고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그 뒤로 몇페이지에 걸쳐 그의 죽음에 대한 원통함으로 할애하고, 나머지는 의미없는 찌라시만 와글와글했다. 그나마 건진거라곤 최근 학라에 개구리가 늘었다는것 정도였다. "요즘엔 씨발, 신문에 괴담도 막 실어주나 보지?" 적마가 궁시렁대며 미지근한 커피를 마시는 동안 영원은 상을 가져가 설거지를 하고 불만스런 소리를 웅얼거리며 창을 열어 청소를 했다. 뿌연 연기가 방안을 가득 채우다말고 흩어졌다.

볼것 없는 신문을 의미없이 펄럭이다 적마는 담배를 껐다. 슬슬 나갈시간이 됐다. 자리에서 일어나 싱크대 옆면을 발로 툭 차 손의 물기를 옷자락에 닦아내던 영원의 고개를 들게했다.

「청소는 이제 됐고, 너도 가서 준비하지 그러냐.」
「먼저 가버리지 말고 나 기다려주세요.」
「하는거 보고.」

영원은 단번에 입을 대빨 내밀었다. 일단 가라니 가는데 영 못미더운지 신발을 구겨신으며 벽을 두드렸다.

「진짜 먼저 갈거에요?」

적마는 반쯤 떨어진 문짝이 망가지지 않도록 옷장을 열다말고 입모양을 크게 해 대답했다.

"그럼 앞에서 기다리던가."

그제서야 아이가 입을 쑥 집어넣고 방을 나갔다. 적마는 옷장안에 걸려있는 양복 한 벌을 침대위로 내팽겨치며 옷을 벗었다. 인정머리도 없는 땅거지 새끼들, 보금품이라고 내놓는게 하나같이 낡아 빠진 구닥다리 뿐이다. 이렇게 아무말도 않다보면 옆방 혹은 위 아래 방에서 걸어다니는 소리, 물건 질질 끄는소리, 뭐라 중얼대고 욕하는 소리 따위가 어렴풋이 울렸다. 지금은 낮이라 그렇다쳐도 밤까지 층간소음이 이어질때면 몹시도 거슬렸다. 창밖마저 요란하니 끄트머리가 누르스름하게 삭아 먼지 날리는 커튼도 떼지 못하는 것이다. 혁대를 채울 때 옆에 있는 영원의 방인지 어딘지 모를 곳에서 우당탕거리는 큰소리가 났다. 어떤 병신새끼가 드디어 수리비를 뜯길 모양이다. 이죽이며 자켓을 껴입었다. 셔츠는 그렇다 쳐도 이것까지 길이에 비해 품이 덜 맞아 딱 맞는 팔부분을 잡아 늘리는데 안주머니에 무언가 들어있었다. 담배갑이었다.

안이 헐거운게 딱 돛대만 남았다. 뒷면에 사인펜으로 적은 글씨가 있었다.

『하나 남은 것에는 행운이 있다. 이것이 당신에게 행운을 가져다주기를.』

적마는 입을 삐죽였다. 행운은 니미 씨벌, 기도 안 차는 소리다.

"지 가족중에 혼자 덜렁 살아남아도 저딴소리 하나 보자, 씹새끼."

혼잣말에 대답이라도 해주듯 신입들은 나와 준비하라며 밖에서 만독이 외쳤다. 적마는 넥타이의 마지막 매듭을 느슨히 마무리짓고 선글라스를 꼈다. 여름이었나, 영원이 하석열의 마작판에 끼어들자마자 천화를 내서 쓸어모은 판돈으로 사준건데 값이 좀 된다고 제법 매끈한 맛이 있었다. 손재주 하난 인정한다. 아이가 까만색으로 염색해준 머리도 원래의 붉은빛은 감쪽같았다.

밖으로 나와 구두끈을 조여매던 영원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걸음을 잠시 절뚝거린다 했더니 아무래도 그 옷장 문에 발등을 정통으로 찧은 병신새끼가 이 녀석이었나 보다. 난간 너머 1층 건물 앞에는 이미 몇몇이 나와있었고, 다른 방에서도 부랴부랴 뒤따라오는 놈들까지 멀쩡히 생겨먹은게 단 한명도 없었다. 꼴에 학라에서 한 몫 크게 잡을 수 있는 현무회에 들어간다고 저마나 눈에 힘을 주거나 머리빡을 비뚜름히 내놓으며 어깨를 거들먹대는 꼬라지가 적마의 눈엔 우스울 따름이었다. 영원도 비슷하게 느꼈는지 코 밑을 훔치는 척 하며 몰래 비웃는게 보였다. 두 사람을 포함한 신입들의 정렬을 확인한 뒤 맨 앞에 있던 만독이 뒷짐을 지고 섰다. 전원 각을 잡아 그 행동을 따라했다.

"내 이름은 만독이다."

무슨 한자를 쓰는지 몰라도 좆같은 이름이라고 영원은 생각했다.

"현무회의 행동 대장이고, 본래 안현 님을 보필하는것이 주된 임무이나 입단식이 끝나기 전까지는 너희들을 맡기로 했다. 새로 들어오는 형제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시다는 뜻이니, 그 마음을 배반하지 말도록."

선글라스 위로 적마의 눈썹이 일순 꿈틀했지만 어금니를 꽉 깨물고 인내했다. 슬금슬금 자세가 흐트러지던 영원이 발로 적마를 툭 건들고 손을 작게 움직였다. 「형제들이라니, 좆까라 그래요. 그쵸.」 이어 선두에서 걸어가는 만독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띨빵이, 머저리, 안현 그 새끼가 천하의 개새끼인줄 모르고 꼬리치는 병신들. 평소 같았으면 계집애가 상스러우니 말 좀 곱게 하라고 한마디 했겠지만 주어가 안현인건 봐줄만 해 적마는 고개만 끄덕여줬다.

학라의 복잡한 뒷골목을 따라 걸어갔다. 만독을 알아본 주민들은 알아서 길을 터주고 뭣모르고 튀어나가는 아이들을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양 옆으로 물때가 고인 원색의 천막 아래 출처불문의 물건을 내다파는 좌판들을 뒤로 하고 점점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과 건물의 좁은 틈새 사이 내걸린 빨래가 종종 머리맡을 스쳤다. 그래도 사람이 살아보겠다고 검은 곰팡인지 녹물인지 모를것이 흘러내린 외벽으로 실외기가 따개비처럼 붙어있었다. 발 밑의 하수구에서 썩은내가 올라왔다. 배수관에도 담배꽁초가 수북히 쌓였다. 어느 양아치가 그린지 모를 낙서, 한쪽 다리가 빠져 기울어진 의자, 미라처럼 말라 비틀어진 가슴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노인네… 그 지저분한 것들을 지나 마침내 훨씬 더 지저분한 폐건물에 다다랐다. 수군거리는 소리와 입모양이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에이 씨발, 생각보다 별거 아닌거 아냐?"
"현무회에 들어가면 다 형제라더니, 형제를 이런데에서 맞이하는게 말이 되냐?"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남자가 어울리지 않는 연분홍색 입을 놀렸다.

"… 장대인. 장대인이 서거하셔서 그렇지, 뭐."
"그 선우 안현이란 놈은 아직 산주가 아니잖아."

이곳까지 오는 동안 장대인의 흔적이 내내 따라붙었다. 어느 곳에도 문 앞에는 흰 꽃이 걸려있었고 검은 옷을 입은 아이들은 종이 비행기를 들고 추모곡에 장대인의 이름을 넣어 불렀다. 아직까지도 그의 이름 세 글자가 가진 힘이 학라에 잔재하는 것이다. 자리는 신뢰를 만든다. 신뢰는 사람을 제 아래에 거느리고 충성을 다해 따르게 하는 힘을, 권력을, 이윽고 천하를 가져다준다. 지금의 안현이 무엇보다도 손에 넣어야 할 것이지만 그 꼴을 순순히 볼 바에야 차라리 혀 씹고 죽는게 나았다. 니미럴, 그 개자식은 옥좌는 커녕 평생 변기에도 앉지 못하게 조져버릴거다.

만독이 문을 두드렸다. 벌겋게 녹이 슬고 칠이 다 벗겨진 쇠문이 탕, 진동하고 되돌아오는 과정에서 마찰음을 내어 듣도 못한 소리가 났다. 기다렸다는듯 문이 열렸다. 발을 들인다. 열몇명 남짓한 사람들의 발소리가 불규칙하게 울리고 묵직하게 문이 닫혀가던 그 때, 무언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적마가 반사적으로 근원지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그를 바라보고 있는것은 총구였다.

검은 총구. 그것이 영원을 포함해 다른 이들을 겨누고 있었다.

여태 같은 신입이라 했던 일부가 남은 인원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신입 안에 감시자를 섞은건 그렇다쳐도 입단방식이 이딴식으로 바꼈다니, 무식한것도 정도가 있다. 침착하게 손을 들거나 당황해 욕을 더듬는 사람들과 함께 전원 포위된 상태에서 달리 반격할 방도는 없었다. 총알이 안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총은 만병지왕이다. 그나마 대책이라곤 자세가 가장 좋지 않은 놈을 기준으로 퇴로를 파악해 총을 뺏든 고기방패로 쓰든 몸을 숨기는게 다 였다. 최대한 빠르고, 짧게. 영원과 시선을 교환했다. 남동쪽의 철근더미를 파악하자마자 총성이 선수를 쳤다. 불협적으로 총을 맞은 사람들에게서 쇳비린내와 붉은 핏물이 뿜어져나와 사방으로 튀었다. 하나 둘 쓰러진 가운데 적마와 영원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총을 든 사람들은 예사롭게도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시체를 끌어냈다.

"신입을 가장해 현무회에 잠입한 자객이다."

안쪽에서 누군가 말했다. 특유의 긁는듯한 낮고 짙은 목소리가 선명히 박혀들어와 뇌리에서 공명했다. 짐승의 아가리와도 같은 어둠에서부터 구두굽소리가 다가와 이내 모습을 드러냈다. 음울한 낯빛에서도 번뜩이는 붉고 검은 눈, 오만한 시선, 위압적인 체격과 소매 아래 두터운 양팔에는 뱀의 꼬리가 휘감겨 있었다. 그 모습을 두 사람은 단 한번도 잊은 적 없다.

선우 안현이다.

고양감과 함께 전신에 피가 돌면서 모든 감각이 그를 향했다. 세포 단위에서부터 부르짖는다. 그간 나의 눈은 저 자의 치욕스러운 몰락을 지켜보기 위해 트여있고, 나의 귀는 저 자의 고통스러운 비명을 듣기 위해 뚫려있으며, 나의 입과 손가락과 심장까지 저 자를 산채로 씹어 삼키기 위해 존재했다고. 오직 그것만을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장 대인이 죽었다고 나를 우습게 봤나 본데…."

그가 낮은 계단을 내려와 두 사람의 앞으로 걸어오자 만독이 영원의 뒷통수를 깊게 눌렀다.

"어디서 고갤 빳빳이 처들고 있나, 숙여라."

우악스러운 힘에 고개가 고꾸라지며 짧은 단발머리가 흘러내렸다. 그 까만 틈새로 영원의 금색눈이 서슬 퍼렇게 희번덕거렸다. 적마는 진작 숙였던 고개를 더 깊숙히 내렸다. 손바닥에 손톱이 내리박힐 정도로 주먹만 으스러 쥔 채 침묵했다. 제 목숨이 아홉개라도 되는것마냥 구는 저 계집과 달리 적마는 치기를 느끼기엔 너무 나이가 많았고 허투로 일을 그르칠 아량과 자비 따위도 없었다.

그 어떤 맹수라도 먹잇감을 노릴 땐 기척을 지우고 숨을 참는법이다.

안현의 기척이 목전에서 멈춰섰다. 두 사람이 자신에게 얼마나 깊게 복종을 표하는지 훑어보는 시선을 따라 우수수 소름이 끼쳤다. 모멸감이 든다. 역겹다. 그가 만족스레 웃으며 담배를 꺼내 물자 만독이 정중히 불을 붙여줬다.

"남자 하나에 여자 하나라… 그래, 그래야지. 하나 남은 것에 행운이 따르리라는 점괘가 맞을지도 모르겠군."

그의 숨 한모금에 선단이 붉고 까맣게 타들어갔다. 느리게 연기를 뱉어낸 뒤 읊조리는 뜻모를 말에 적마는 문득 담배갑에 적혀있었던 문구가 떠올랐다. 니미 씨벌. 또 같은 욕이 맴돈다.

그의 강냉이든 면상이든 당장에 갈겨버리고 싶은 적마와 영원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현은 좆같이 황송하게도 옘병할 옥체를 친히 숙여 직접 두 사람의 허리춤에 무언가를 달아주었다. 오묘한 포말 무늬를 가진 대모(玳瑁)갑중에서도 흑갑으로 만든 패였다. 몹시도 잘 다듬어져 반지르르하게 윤이 나는 뒷면에 현무회라는 세글자가 적혀있었다. 안현은 절반쯤 탄 꽁초를 버리고 두 사람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줬다.

"바로 너희들 말이다."

적마가 장대인에게 하사받은 흑갑패를 깨부순건 그 누구도 아닌 안현이었다. 파편에 손이 찔려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산산조각이 나도록 짓이겼던 주제에 이제와서 새로운 것을 달아주고 있다. 배꼽이 웃을 지경이다. 파문시켜 시궁창에 버려놓은 형제가 살아있단걸, 살아서, 고개를 숙이는것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을 죽이기 위해 혈안을 뜨고 돌아왔단걸 알게 되면 안현의 낯짝이 과연 어떨까 싶었다. "그럼 이따들 보지." 안현은 유유히 두 사람을 지나쳐갔다.

멀어지는 기척에 영원은 고개를 들었다. 안현의 곁에 서있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각각 노인과 애새끼였는데, 반백의 머리를 깔끔히 빗어올린 노인은 입고있는 옷부터 큰키에 각진 뼈대가 도드라져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인상이었다. 완고해보이는 얼굴이 적마와 영원을 바라보다 이내 앞을 향했다. 그 옆을 애새끼가 뒤따랐다. 가벼운 걸음걸이에 길게 땋은 머리가 개의 꼬리처럼 흔들렸다. 저보다는 나이가 있어보였지만 가느다란 눈을 휘며 살랑살랑 손까지 흔드는 꼴에 영원은 인상을 구기며 입안에서 열심히 욕을 곱씹었다. 적마도 가는 시선으로 응시 할 뿐이었다. 그들의 뒷모습을 향해 인사를 건네던 만독이 허리를 펴고 턱을 까딱였다.

"우리도 이동한다. 따라오도록."

두 사람은 묵묵히 걸었다. 목울대를 꾹 조여오는 것이 있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끓어오르던 분노와 살의는 발열점을 넘어선 순간 거짓말처럼 고요해지고 이제는 희열만이 남았다. 그토록 다시 만날 날 만을 기다려오지 않았던가. 안현의 목숨줄은 이제 손 안에 들어왔다. 이것을 단단히 움켜쥐고, 잡아당겨, 벼르고 벼려온 이빨로 찢어발길 순간이 머지않았다. 바로 오늘로부터, 드디어, 드디어!

이열종대로 세워야 했던 인원이 이제는 적마와 영원만 남았다. 미로 같은 길을 걷고 여러 건물을 거쳐 또 다시 어딘가로 향했다. 사치스럽고 휘황찬란한 장식을 보며 적마는 이 곳이 현무회의 본관에 있는 연회장이라는것을 깨달았고 영원은 생전 처음보는 시큰거림에 눈을 비볐다. 만독이 저 똘추가 길을 모르는건지 아니면 숨겨진 길을 신입들이 외우지 못하게 할 속셈인지 돌아도 너무 돌아왔다. 그럴수록 지난 기억은 더더욱 또렷해졌다. 곳곳에 있는 문에서 저마다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리다 별안간 찬물을 끼얹듯 숨을 들이삼키고, 조용해졌다. 빼곡한 시선들은 오직 단상 위로 올라서는 안현에게로 향했다.

주제에 제법 권위로운척 구는게 가소로웠지만 다른 이들에겐 마음이 사로잡히는 무언가가 있으리라. 주변을 넓게 둘러 모두가 자신을 올려다 보는것을 확인한 안현이 입을 열었다.

"오면서 불미스러운 일을 겪은 사람들이 있겠지만, 괘념치 않길 바란다."

분위기가 잠시 술렁였으나 안현의 위압감에 다시 가라앉았다. 절제된 손동작이 그를 따랐다.

"우리는, 어제까지 가장 멀리 자리했으나 오늘부터는 가장 가까이 산다."

적절한 호흡을 섞고

"우리는 가족이다."

내놓은 말에는 심원한 호소력이 있었다.

"이 이름은 신뢰와 결속의 언어로 쓰인다. 어떤 형제도 너의 위기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며, 너희 또한 응당 그래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현무의 자비를 시험하지 말도록. 나는 인내심이 깊지 않다. 그러니 너희가 내게 예우를 받고 싶다면, 그에 걸맞는 충성을 바쳐야 할 것이다."

나직한 연설을 멈추고 안현이 손을 들었다. 허리춤에 흑갑패를 단 조직원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같은 것을 달아주기 시작했다. 일사분란한 그 모습을 안현은 대단히 흡족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명예로운것을 하사해주는것 마냥 우월감과 자부심에 흠뻑 도취되어 있었다. 그런 안현에게도 모두와 같은 흑갑패가 달려있다. 그가 말을 이어갔다.

"누군가 너희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현무의 핏줄이라고 답해라. 너희가 해하는 자에게는 현무의 분노가 뒤따를 것이고, 은혜를 베푼 자에게는 기쁨과 보답이 함께 할 것이라는 사실을 뼛속 깊이 새겨둬라."

그가 힘있게 단상을 내리쳤다.

"잊지 마라."

잊으래도 잊지 않을것이다.

"우리는 하나다!"

저 씨발놈의 모든것을.

 


감격하다 못해 눈물을 줄줄 흘리는 몇몇 천치들을 보며 영원은 애써 역겨움을 참아냈다. 고개를 숙였는데도 울렁거리는 눈 앞에 안현의 입모양이 잔상처럼 남았다. 가족, 가족이라 했다. 저 좆같은 새끼는 우리 엄마아빠는 물론 죄 없는 내 동생까지 죽여놓은 주제에 진정으로 가족이 무엇인지나 알까? 감히 그것을 입에 담을 자격이나 되나? 되물어본들 소리 내어 말 할 수 없는 영원에겐 불쾌함만 복기할 뿐 이었다. 적마도 그러했다. 더러운 골목길에 나돌아 다니는 개새끼도 같은 핏줄끼리는 물어뜯지 않는다. 하물며 인간의 가죽을 쓰고 꾸역꾸역 현무를 탐하는 저 후레자식하고 어찌 가족이라 할 수 있겠는가. 영원은 선글라스 너머로 안현을 응시하는 적마의 팔을 툭 건들이고 손을 움직였다.

「좆같아서 토 할것 같아요.」

적마가 영원을 바라봤다. 저와 달리 조금 헐렁한 정장차림의 아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다 대답했다.

「너는 무슨 좆도 없으면서….」
「아저씨가 봤어요?」

기분이 좋지 않았던 탓인지 영원이 으르렁대며 항의했다. 적마가 못본척 고개를 돌리자 기어이 그쪽으로 따라가 앞에서 손을 움직이는 것이다.

「나한테 좆이 달렸는지 안 달렸는지 아저씨가 봤냐구요!」
"아이고, 정신 사납다 이 년아!"

결국 작게 한소리하며 치켜든 까만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아줬다. 나름 힘조절을 했는데도 얼얼한지 영원은 켁, 하는 막힌 소리를 내며 머리를 부여잡고 고꾸라졌다. 젖히듯 일어나 찔끔 눈물이 맺혀 흘겨보는 시선을 적마도 마주 흘겨봐줬다. 영원이 가운데 손가락을 들었다. 적마는 두 손으로 다 들어줬다.

두 사람이 그 지랄을 하는 사이, 안현의 지시에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수행원들이 술병을 하나씩 들려주었다. 성인 남자의 반뼘정도 되는 작은 자기술병이다. 안현의 탐욕만큼이나 번들거리는 검은 몸체에 날카로운 음각 사이로 새빨간 주묵이 스며들어 현무의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그 외에도 신입들은 휴대폰과 나이프를 더 받고, 이어 노인과 애새끼, 안현에게까지 술병이 전달되었다. 다시금 그에게로 이목이 집중되었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가운데 그가 술병을 들었다. 단상 아래의 사람들도 손에 쥔것을 일제히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형제를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위하여!"

우레와 같은 복창이 터져나오고 모두가 안현과 함께 술을 들이켰다. 손에 쥔 붉은 뱀 두마리의 눈을 응시한 순간 적마에게는 떠오르는것이 있었다. 36년전의 오늘이다. 적마의 입단식에 안현은 없었다. 그는 늘 자신의 등 뒤에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우월해야할 자신보다 먼저 장대인이 하사한 술을 기울이는 적마의 모습을, 선배로서 형제로서 직접 흑갑패를 달아주고 기꺼이 등을 맡겼던 모습을 올려다보며 안현은 어떤 낯짝을 하고 있었던가. 문득 어깨죽지가 아려왔지만 그 전에 먼저 웃음이 샜다. 일련의 과정이 우습고, 같잖고, 그래서 유쾌할 따름이다. 적마는 옛추억을 회상하는 늙은이의 태도로 남들보다 조금 늦게 술을 들이켰다. 목넘김이 쓰고 독했다.

이로써 7년만에 현무의 소굴로 돌아왔다. 사흘이 남았다. 고작 그 뿐 일지라도 선우 안현을 떨어트리기엔 더할나위없이 충분했다.
이제 더는 기다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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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렌토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