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언어가 불가능함)

2016. 1. 24. 21:46 from LOG






0)


 엄마는 때때로 외할머니의 사진을 가만히 내려다보고는 했었다. 말을 건넨다거나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지났다고, 그래서 그저 조용히 바라만 봤다. 사진속의 할머니는 마당에 심어놓은 금목서를 배경으로 단정히 기모노를 차려입은 채 웃고 있었다. 엄마는 그 주름진 웃는 얼굴을 손가락으로 쓸거나, 오래되어보이는 나무 액자틀을 닦았다. 나기사, 할머니 기억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한참 인큐베이터안에 있었을 때 돌아가셨다고 했으니 알 턱이 없었다. 엄마는 다른 대답은 바라지도 않았다는 듯이 웃었다. 


 시간은 너무나도 냉정하고 잔인해서 잊혀짐은 빠르다고 했다.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이제는 목소리도, 같이 지내면서 보내온 일들도 어렴풋하다면서 엄마는 멋쩍은 듯이 눈썹을 늘어트렸다. 무뎌진듯 말하는 엄마의 모습은 어딘가 쓸쓸해보였다. 어느 한 구석이 텅 비어보였다. 그런 공허함은 내겐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먼 훗날에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장은 필요하지 않았고, 물론 원하지도 않았다. 그때에는 그랬었다. 

 낯설고 막연하기만해서, 내가 그 모습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 * *






14)


 아직 나는 너와 함께 있던 교정, 함께 부활동을 하던 체육관, 함께 등하교를 하던 길목을 거닐고 있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불었으며 학교는 언제나처럼 소란스러웠다. 체육관에는 신발 밑창이 끌리는 소리와 공이 튕겨오르는 소리로 가득했다. 거리에는 이제 벚꽃도 피었다. 너의 존재는 이름 그대로 하늘이 되고 그와 함께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백으로 변했지만 세상은 그대로였다. 달라진것은 오로지 너와 나 뿐이다. 




 습관처럼 대문앞에서 네 모습을 기다리다 료타가 자전거를 끌고 데리러 나왔을때야 정신을 차렸다. 고맙게도 신경을 써 주고 있는지 아침인사 외에는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묵묵히 자전거 페달만 밟았다. 교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체육관에서도 그랬다. 모두 상냥한 사람들이었다. 그 친절 덕분에 혼자 멍하니 있는 시간이 늘었다. 그럴 때 마다 복도 쪽 창밖이나 열려있는 체육관 문을 바라봤다. 어느곳에 시선을 둬도 네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항상 있었던 곳에서도 이제 너는 없었다. 


 복도를 걷다가 앞에 있는 게시판을 보지 못하고 부딪혀버리고 말았다. 끌어당겨주는 손길은 이제 없다. 그대로 넘어졌지만 일으켜주는 사람 역시 없었다. 혼자 일어나 교복치마를 툭툭 털었다. 이게 현실이었다.  






1)


 점심시간에는 항상 그랬던 것 처럼 옥상에 갔다. 늘 엇박자로 들려오던 발소리는 지금은 한사람의 몫 뿐이다. 옥상의 철문은 꽤나 무거워서, 문고리를 돌리면서 몸으로 기대서 밀어 열어야 했었다. 간단하게 열 수 있던 사람은 이제 없으니 스스로 열어야 했다. 낡은 소리와 함께 펼쳐진 옥상의 하늘은 늘 그랬던 것 처럼 탁 트여있었다. 시원한 바람도 불었다.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어깨위에서 느슨히 묶었다. 날씨는 이제 다 풀려서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었다. 슬슬 하복을 꺼내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가 됐다. 그늘에 앉아 교복 소매를 조금 걷었다.




 아무것도 먹고싶지 않았었다. 장례식장에서 겨우 참았던 눈물을 방에 틀어박혀 닦아내느라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보다못한 작은오빠가 슈크림을 사왔다. 푸딩도 있었다. 성의를 봐서 겨우 앞에 앉았지만 결국 또 울어버리고 말았다. 네게 주겠다 약속했던 딸기 슈크림이었다. 

 그냥 이대로 너를 따라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것같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시간이 좀 더 지나게 되자 배가 고팠다. 목도 많이 말랐다. 잠도 왔다. 한밤중에 혼자서는 다 먹지도 못할 정도로 먹고 배탈이 나고 말았다. 너는 죽었는데 나는 살아있다. 살아서 밥도 먹고 잠도 자고 배탈이 나서 아프기도 했다. 아픈것보다도 그 사실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싫다고 말 했는데도 도시락 한 구석에는 새카만 콩조림이 있었다. 아무도 없는 옆자리에 뚜껑을 내려놓았다. 한쪽으로 밀어놓아도 태연하게 앞으로 많이 가져와야겠다고 장난을 칠 사람 또한 역시 없었다. 묵묵히 입에 넣었다. 맛 없었다. 정말 맛없었다. 다 먹어도 칭찬해줄 사람은 이제 없는데, 그런데도 꾸역꾸역 먹었다. 






24) 


 꿈을 꿨다. 오랜만에 꾸는 꿈에서는 예쁜빛의 벚꽃이 길가 가득 만개하게 흐드러져있었다. 뽀얀 분홍빛은 우유가 담긴 머그컵에 띄우면 달콤한 맛이 날 것 같을정도로 화사했다. 그 밝은길을 나는 너와 걷고 있었다. 네 손에 이끌리는 빈 자전거에서 가끔 덜컹이는 소리가 났다. 익숙한 소리였다.



 나는 늘 그랬던 것 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네 목소리가 듣고싶어서 사소한 말들을 먼저 꺼내놓았던 것은 이제는 버릇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앞을 보지 않고 걷다가 부딪히는 바람에 사람 많은 복도에서 엉덩방아를 찧어버린 얘기를 했다. 엄마가 싸준 도시락에 있는 콩조림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는 얘기를 했다. 너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햇빛에 가려졌지만 늘 그랬던 것 처럼 웃는 얼굴을 했다. 가끔씩 길 옆을 지나다니는 자동차 소리에 들리지 않았지만 항상 그래줬던 것 처럼 대답을 해줬다. 나는 웃었다. 위화감은 일찍이 가득 차 있었지만 내 앞의 너의 모습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행복해서 웃었다. 


 자전거 핸들을 잡고 있던 네 한 손이 내 머리에 닿았다. 머릿결을 따라 쓰다듬어 주었다. 바람이 불어서 그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따뜻했다. 따뜻할 것 이다. 벚꽃잎이 소리를 내며 바람에 따라 흩날렸다. 너와 내가 있는 거리를 가득 감쌌다. 기억으로 남아있는 꿈속의 네게서 느껴지는것은 없었다. 그걸 알아채자마자 모든게 아득해져 갔다. 거세게 부는 바람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떴을때엔 어느새 너는 없었다. 빈 자전거만 홀로 세워져있었다. 




 때마침 맞춰놓은 알람이 시끄럽게 울렸다. 트럼펫이 긴 음을 미끄러지듯 내뱉고 눈치없게 연주가 시작되어서 집어든 휴대폰을 침대 밖으로 던져버렸다. 테이블 다리에 부딪혀 배터리가 빠져나와버린 휴대폰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겨우 만난 네 모습은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는걸 각인 시키기라도 하듯이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내가 바랐던 그리움은 없었다. 이제는 괜찮을 줄 알았다. 지갑속에 넣어두었던 네 사진을 봐도 울지 않을 정도가 되었으니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나는 아직도 네가 그리웠다. 부정해도 바뀌지 않는 현실이 원망스러워서 울어버리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너의 존재가 조금씩 사라져가는게 무서웠다.  





29)


 부활동을 그만두었다. 네가 밝게 빛나는 모습으로 있을 수 있었고 그래서 내가 제일 좋아했었던 곳에서 나는 더 이상 혼자 살아있을 자신이 없었다. 아직은 웃으면서 네가 있었을 때 처럼 지낼 수 없었다. 가끔 놀러오겠다는 말을 해버렸지만, 퇴부서를 낸 뒤로 그 산을 한번도 넘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구태여 네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갑자기 상태가 나빠진 발목때문에 계단마저 오를 수 없게 된 일이나, 감기에 걸려 며칠 병원에 입원했던 일이나. 걱정해주는 걸 알면서도 큰오빠에게 화를 내버리고 결국 싸웠던 일같은건 다 삼켜두고 나는 네 앞에서는 다른 이야기만 꺼냈다. 사진속의 너는 웃고 있으니까 나도 웃어야 했다. 영원히 믿음직한 매니저로 네게 남고 싶었다. 늘 예쁘게 웃고 있는 하나뿐인 애인으로 남아있고 싶었다. 너의 시간은 교복을 입은채로 멈춰버리고 말았는데 내 시간은 지금도 흘러가고 있다. 그걸 외면하고 나는 납골당에서는 즐겁고 행복한 이야기만 했다. 웃었다. 


 들려오지도 않는 물음에 혼자서 대답을 하며 멋쩍게 웃었다. 괜스레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왠지 지금 소라선배가 와줄 것 같았어요. 유리창 너머 사진속의 너는 당연하게도 말이 없다. 이상하죠? 그치만 나기 어제 선배를 꿈에서 만났으니까요. 비춰지는 것은 어렴풋한 내 모습뿐이다. 항상 어딜가도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했던 커다란 네가 지금은 사물함 정도되는 좁은 공간에 들어가있다. 내가 들어가기에도 벅차보이는데 나보다 훌쩍 큰 너는 어떻게 들어가있는 걸까. 이렇게 좁은곳에서 어떻게 혼자 있는 걸까.




 손을 잡고 싶었다. 보고싶었다.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머리카락을 넘겨주던 네 손길이 그리웠다. 끌어안아주면 가까워지던 심장소리가, 따뜻했던 체온을 한번만이어도 좋으니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네 품에 기대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직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는데 나를 사랑해주고 내가 사랑할 너는 더 이상 이 하늘 아래에 없다. 혼자 살아있는 나는 너와 함께 할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버거웠다. 겁이났다. 영원히 웃고 있을 네가 빛바랜 사진으로 변해가는걸 나는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우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어서 일어났다. 다음에 또 오겠다면서 애써 웃으면서 한걸음씩 내딛었지만, 여전히 파랗고 맑은 하늘을 보자 결국 소리내 울어버리고 말았다. 구름 한점 없이 청명한 하늘이었다. 네가 좋아하던 그런 날씨였다.






30)


 네가 내 곁을 떠나간지 어느덧 한달 째 되는 날 이었다. 나는 아직도 너를 잊을 수 없었다. 잊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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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렌토상 :